'우리詩' 5월호의 시와 참꽃
♧ 쌀집 할매 - 김성중
동짓죽을 쑤려면 팥이 넉 되가 필요했다. 어제 시장에서 할매가 파는 햇팥이 보기에도 좋아서 넉 되를 사려고 했지만 현금이 부족해서 두 되만 사고 내일 두 되를 더 사기로 했다.
오늘 금성산성 아래 농가맛집에서 버섯전골을 시식하는데 캄캄한 밤이 되었다. 미리 전화로 팥을 폴러간다고 했더니 언제든지 문을 두드리면 가게문을 열어준다고 했었다.
할매는 까만 봉지 두 개에 팥을 담아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가신다.
“할매, 햇팥이 아닌디요.”
“나는 잘 안 보여…”
“할매, 바구미가 많이 묵었는디요?”
“몰라. 나는 잘 안 보여.”
다음날 한새봉에서 40명 분 팥죽을 쑤어서 먹으려면 집에 가서 팥을 삶고 준비를 해야 해서 팥 두 되를 폴아오면서 아내왚 “쌀집 할매 능청 연기는 초특급 주연배우네”라는 얘기를 나누면서 웃고 말았다.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우리 쌀집 할매 춘추가 올해 여든넷이다.
♧ 종교 - 민문자
인간이 죽으면 영육이 분리되어
육체는 화장장의 연기로 사라지고
영혼은 천당이나 지옥으로 간다지?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며 도를 닦는
종교 지도자나 그를 따르는 종교인은
예배를 드리고 찬송가를 부르는가
세상에는 참 여러 종류의 종교가 있다
모두 자신의 종교가 참 종교라고 하는데
죽어보아야 어느 종교가 진짜인지 알겠지?
진짜로 죽었다 살아온 사람이 있을까?
모두 자신의 종교가 참 종교라고 하는데
선하게 살다 죽어도 천당은 못 가고
참 종교를 믿어야 천당에 간다는데
세상에 하고많은 종교가 난립인데
진짜를 구별할 수가 없어서 난감하도다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마다
종교 문제가 사회를 뒤흔드는 것은
인간의 무지 때문인가, 지혜 때문인가
♧ 꽃잎 같은 세상 – 이윤진
날은 저물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하루
학교 정문에 벚꽃 잎이 휘날린다
꽃잎이 휘뚝거리며 머리 위에 떨어진다
꽃비가 이리도 다붓할까 내 어깨 위에서만 그리 다감할까
그 꽃잎은 빙글빙글 돌아서 제자리로 찾아 든다
날개 같은 몸짓에 떠나간 울 언니 얼굴이 어른거린다
밖을 나서지 못한 사이 봄이 들었단 말인가
온통 꽃 세상이 되었건만,
눈물 담은 말 펴놓고 옥죄이며 서 있다
또다시 꽃잎은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봄 위에 사푼사푼 기억의 꿈을 꾸던 꽃비가 아니다
회색 구름 가득한 봄날이다
꽃잎 같은 세상이 열렸음이야 점점 큰소리로 은우殷憂하고 싶다.
♧ 풍선 - 이기헌
바람 부는 날
부슬부슬 비 오는 날
누가 버렸는지
풍선 하나 시장통에
나뒹굴고 있다
작은 미동에도 슬금슬금
오가는 사람들 눈치만 본다
딱히 갈 곳도 없다
은근슬쩍
빵집 안을 기웃거리지만
주인이 발로 툭 건드리자
다시 미아가 된다
연분홍빛 옷을 입었지만
흙탕물에 얼룩이 져서
어린아이도 탐내지 않는다
조금씩 작아져 가는
그의 뒷모습
후미진 골목으로
사라진다
♧ 사랑, 그 눈꺼풀 - 성숙옥
마음을 꽃으로 피워냈지
웃음소리도 눈 흘김도 향기로 느껴졌지
낡고 시드는 것을 몰랐던 때
저녁이 되어도 불 켜지지 않는 빈집 되어
빛의 환상을 쫓아다녔지
엎드린 길을 곱씹으면서 한숨을 뿜어냈지
오른쪽과 왼쪽을 서로 고집하다
비탈길에서 흙에 뒹굴고 말았던가
그늘에 부딪혀 목이 꺾인 꽃을
그 혈흔을
누군가 흘깃 쳐다보며 지나갔지
그 날카로운 오르막에서
파르르 떠는 속눈썹
꼭 맞을 것 같은 신발도 신고서야
알게 되는 통점을
생화를 지지 않는 조화로 보게 되는 눈꺼풀,
갔다가도 물거품 싣고 다시 오는 파도
그것은
♧ 복룡리의 봄 - 김해미
지금쯤 고향엔 배꽃이 천지일 텐데 고희는 족히 바라보는 우리 엄마가요 삼신할미나 되었나 봐요 쪼그랑 손에 그림붓 들고 암꽃과 수꽃 꽃가루받이를 한다나요 대낮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개 두 마리가 헐떡여요 알이 부화하기 딱 좋은 뜨끈한 햇볕 애 넷이나 부화시켰던 쪼그라든 배 아래 울엄마 빈 달항아리에 묵직하게 들어차나 봐요 한 때 부풀었던 젖 같은 꽃이 비린 것도 같아요 노랑 띠, 까만 줄무늬 제복도 없이 꿀벌처럼 앵앵 배나무를 맴돌아요 따라올 벌떼는 없어요 천 평, 이 천 평 너른 밭 나무 한 그루 허투루 보지 않는 야무진 솜씨로 그림을 그리는데 그림 대회에서 상 받은 나보다 어설픈 시 쓰는 나보다 날렵하고 정확해서 가을이면 엄마 젖가슴 닮은 황금빛 배를 깨물면 하얀 웃음 폴폴 호접처럼 날릴 것도 같아 보름달 아래 배꽃 지는 것을 우두커니 지켜보았어요
* 시 : 월간 『우리詩』 2020년 5월호(통권383호)에서
* 사진 : 한라산 둘레길 2코스의 참꽃(5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