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우리詩' 5월호의 시와 참꽃

김창집 2020. 5. 25. 10:57

 

쌀집 할매 - 김성중

 

  동짓죽을 쑤려면 팥이 넉 되가 필요했다. 어제 시장에서 할매가 파는 햇팥이 보기에도 좋아서 넉 되를 사려고 했지만 현금이 부족해서 두 되만 사고 내일 두 되를 더 사기로 했다.

 

  오늘 금성산성 아래 농가맛집에서 버섯전골을 시식하는데 캄캄한 밤이 되었다. 미리 전화로 팥을 폴러간다고 했더니 언제든지 문을 두드리면 가게문을 열어준다고 했었다.

 

  할매는 까만 봉지 두 개에 팥을 담아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가신다.

 

   할매, 햇팥이 아닌디요.”

   나는 잘 안 보여

   할매, 바구미가 많이 묵었는디요?”

   몰라. 나는 잘 안 보여.”

 

   다음날 한새봉에서 40명 분 팥죽을 쑤어서 먹으려면 집에 가서 팥을 삶고 준비를 해야 해서 팥 두 되를 폴아오면서 아내왚 쌀집 할매 능청 연기는 초특급 주연배우네라는 얘기를 나누면서 웃고 말았다.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우리 쌀집 할매 춘추가 올해 여든넷이다.

 

 

종교 - 민문자

 

인간이 죽으면 영육이 분리되어

육체는 화장장의 연기로 사라지고

영혼은 천당이나 지옥으로 간다지?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며 도를 닦는

종교 지도자나 그를 따르는 종교인은

예배를 드리고 찬송가를 부르는가

 

세상에는 참 여러 종류의 종교가 있다

모두 자신의 종교가 참 종교라고 하는데

죽어보아야 어느 종교가 진짜인지 알겠지?

 

진짜로 죽었다 살아온 사람이 있을까?

모두 자신의 종교가 참 종교라고 하는데

선하게 살다 죽어도 천당은 못 가고

 

참 종교를 믿어야 천당에 간다는데

세상에 하고많은 종교가 난립인데

진짜를 구별할 수가 없어서 난감하도다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마다

종교 문제가 사회를 뒤흔드는 것은

인간의 무지 때문인가, 지혜 때문인가

 

 

꽃잎 같은 세상 이윤진

 

날은 저물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하루

학교 정문에 벚꽃 잎이 휘날린다

꽃잎이 휘뚝거리며 머리 위에 떨어진다

꽃비가 이리도 다붓할까 내 어깨 위에서만 그리 다감할까

그 꽃잎은 빙글빙글 돌아서 제자리로 찾아 든다

날개 같은 몸짓에 떠나간 울 언니 얼굴이 어른거린다

밖을 나서지 못한 사이 봄이 들었단 말인가

온통 꽃 세상이 되었건만,

눈물 담은 말 펴놓고 옥죄이며 서 있다

또다시 꽃잎은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봄 위에 사푼사푼 기억의 꿈을 꾸던 꽃비가 아니다

회색 구름 가득한 봄날이다

꽃잎 같은 세상이 열렸음이야 점점 큰소리로 은우殷憂하고 싶다.

 

 

풍선 - 이기헌

 

바람 부는 날

부슬부슬 비 오는 날

누가 버렸는지

풍선 하나 시장통에

나뒹굴고 있다

작은 미동에도 슬금슬금

오가는 사람들 눈치만 본다

딱히 갈 곳도 없다

은근슬쩍

빵집 안을 기웃거리지만

주인이 발로 툭 건드리자

다시 미아가 된다

연분홍빛 옷을 입었지만

흙탕물에 얼룩이 져서

어린아이도 탐내지 않는다

조금씩 작아져 가는

그의 뒷모습

후미진 골목으로

사라진다

 

사랑, 그 눈꺼풀 - 성숙옥

 

마음을 꽃으로 피워냈지

웃음소리도 눈 흘김도 향기로 느껴졌지

낡고 시드는 것을 몰랐던 때

저녁이 되어도 불 켜지지 않는 빈집 되어

빛의 환상을 쫓아다녔지

엎드린 길을 곱씹으면서 한숨을 뿜어냈지

오른쪽과 왼쪽을 서로 고집하다

비탈길에서 흙에 뒹굴고 말았던가

그늘에 부딪혀 목이 꺾인 꽃을

그 혈흔을

누군가 흘깃 쳐다보며 지나갔지

그 날카로운 오르막에서

파르르 떠는 속눈썹

꼭 맞을 것 같은 신발도 신고서야

알게 되는 통점을

생화를 지지 않는 조화로 보게 되는 눈꺼풀,

갔다가도 물거품 싣고 다시 오는 파도

그것은

 

복룡리의 봄 - 김해미

 

   지금쯤 고향엔 배꽃이 천지일 텐데 고희는 족히 바라보는 우리 엄마가요 삼신할미나 되었나 봐요 쪼그랑 손에 그림붓 들고 암꽃과 수꽃 꽃가루받이를 한다나요 대낮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개 두 마리가 헐떡여요 알이 부화하기 딱 좋은 뜨끈한 햇볕 애 넷이나 부화시켰던 쪼그라든 배 아래 울엄마 빈 달항아리에 묵직하게 들어차나 봐요 한 때 부풀었던 젖 같은 꽃이 비린 것도 같아요 노랑 띠, 까만 줄무늬 제복도 없이 꿀벌처럼 앵앵 배나무를 맴돌아요 따라올 벌떼는 없어요 천 평, 이 천 평 너른 밭 나무 한 그루 허투루 보지 않는 야무진 솜씨로 그림을 그리는데 그림 대회에서 상 받은 나보다 어설픈 시 쓰는 나보다 날렵하고 정확해서 가을이면 엄마 젖가슴 닮은 황금빛 배를 깨물면 하얀 웃음 폴폴 호접처럼 날릴 것도 같아 보름달 아래 배꽃 지는 것을 우두커니 지켜보았어요

 

 

                  * : 월간 우리20205월호(통권383)에서

                    * 사진 : 한라산 둘레길 2코스의 참꽃(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