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김신자 시조시집 '당산봉 꽃몸살'

김창집 2020. 5. 26. 10:46

시인의 말

 

다시는 시를 쓰지 못할 줄 알았다

왜 자꾸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다시

어느 봄날 갑자기

녹슨 내 나이를 헤치며

내 안에 올렁울렁 올라오는 언어의 몸짓을 보고

아직 내 정서가 마르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처음으로 착해지기 위해 날마다 시를 생각했다

시 때문에 괴롭다 고통스럽다 생각할 때도 있지만

시 덕분에 이렇게 다행인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다

 

김신자

 

마른, 한치

 

바다도 세상에 잠시

오고플 때 있나 보다

도댓불은 꺼지고 이름만 남은 그 터에

전선에 빨래 걸리듯 걸려있는 한치들

 

주인이 없었는지

그 한치들 사이에

만 원짜리 지폐 한 장 집게에 물려있다

약간은 장난기처럼 몰래 걸고 갔나보다

 

비린내도 파도소리도

가스 불에 올려놓고

호남 말씨 영남 말씨 뒤섞인 자구네 포구

당산봉 어느 무덤도 노을에 익고 있다

 

섬백리향 카톡카톡

 

이 봄날 핑계 삼아 꽃몸살 앓으시나

 

내 안에 난리났네 꽃이 핀다 카톡카톡

 

늦은 밤 흐드러지게 설레는 내 휴대폰

 

마음이 가는 길에 까닭이 있을까요

 

내 심장 꽃 벙글며 무선 길 내닫는다

 

오늘은 분홍 섬백리향 핍니다 카톡카톡

 

용수리저수지에서

 

여기 와 다시 본다

솔방울 소녀를 본다

 

사춘기 젖망울 나오듯 탱탱한 저 송진

한여름 실바람에도 물주름지던 그대 같다

 

꼭꼭 숨겨줘 네 레이더에 내가 떴어

아버지 계신 당산봉 그 끝자리도 비추네

물속에 얼비쳐 오는 내 꿈에 있는 주역들

 

이제는 마을도 숲도 이곳을 다 버린 듯

포구의 비린내로 휴대폰을 찍는다

불러도, 저수지처럼 귀머거리 된 용수리

 

수월봉 해국

 

허걱, 이 녀석 봐라 아픈 바람 품었군

거기가 어느 세곈데 매달려 버텨보나

수월봉 비크레기*에 뿌리내린 외로움

 

너도, 사람이, 이 세상이, 싫었나보다

슬프고 부끄러운 일 누군들 없겠냐만

한 번쯤 헐거운 삶도 피어보고 지는 것

 

해안도로 발걸음은 생각이 너무 많다

핸드폰 사진 한 장 추억을 소환하니

참았다 터트린 울음, 이렇게 가을이 핀다

 

--

* 비크레기 : 비탈지면서 거친 곳.

 

쇠별꽃 1

 

한 철만 보란 듯이 피어나도 좋겠네

 

눈 뜨고 허락 못한 이 생의 슬픈 운명

 

그래도 허물어질까 침묵 속에 감춘다

 

울지 말자, 사랑이 남아 있는 동안은

 

나를 꼭 잡은 손이 봄처럼 스며든다

 

밤마다 빗장을 지른다, 카톡카톡 별이 뜬다

 

쇠별꽃 2

 

더러는 눈물 같고 더러는 한숨 같다

 

당신의 이름 석 자 수놓아서 죄 될까봐

 

뭇별들 성호를 그으며 손 모아 비는 건가

 

피는 게 죄가 되도 안 피는 건 죽음이다

 

반지에 새긴 약속 자분자분 열어보며

 

들길에 가득 번진다 설렌 오월 품은 꽃

 

 

     * 김신자 시조시집 당산봉 꽃몸살(다층현대시조시인선 007, 2020)에서

     * 편집자 주 : 이 시는 표준어로 썼고 또 제주어로도 옮겨졌으나, 제주어 편을 올리면 내 컴 외에는 일부 글자가 다 지워져버려서 이곳에 옮기는 것을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