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문순자 시집 '어쩌다 맑음'

김창집 2020. 5. 27. 10:56

 

 시인의 말

 

 

이젠

 

놓아 주마

 

가난한 내 시편들아!

 

 

2020년 감귤꽃 환한 봄날

 

문순자

 

갯무꽃

 

구엄리 갯무꽃은 혼자 피고 혼자 진다

툇마루 걸터앉은 구순의 내 어머니

한 생애 끌고 온 바다

처얼~썩 철썩 처~얼썩

 

대물릴 게 없어서 바다를 대물렸나

비닐하우스 오이 따듯 덥석 따낸 해녀증

큰올케 노란 오리발

허공을 차올린다

 

삼월보름 물때는 썰물 중의 썰물이라

톳이며 보말 소라 덤으로 듣는 숨비소리

한 구덕 어머니 바다

욕심치레 하고 있다

 

개구리발톱꽃

 

이대로

봄 한철을

폴짝

건너뛰고 싶다

 

경칩보다 날 먼저 찾아온 알레르기성비염

 

오름길

재채기하다

터뜨린

흰 얼룩

 

길마가지나무

 

소나기 쓰윽 훑고 간

한경면 청수곶자왈

 

열에 아홉 사람은 영락없이 놓친다는

 

그 꽃을 보러 왔다가

하마 나도 놓치겠네

 

그다지 예쁜 것도

눈에 띄는 것도 아닌데

 

길마가지 길마가지 소잔등 길마가지

 

봄이 채 오기도 전에

하마 그대 놓치겠네

 

흰 접시꽃

 

이제는 너를 그냥 놓아줘야 할까 보다

내리 딸 둘을 낳자 사흘이 멀다 찾아와

괜찮다, 괜찮다 하시던

시어머니 눈칫밥 같은

 

어디서 구했는지 흰 접시꽃 세 뿌리

벼슬 붉은 장닭 넣고 삼세번만 고아 먹어라

서둘러, 꽃 지기 전에

그래야 약발 받는다

 

그 여름 바람 타던 아들 낳는 비법들

때마침 할망당에 비손하는 접시꽃

꼭 무슨 빚쟁이처럼

여태껏 따라 다닌다

 

갯메꽃

 

똥깅이도 마다하는 돌염전 가장자리

가다가 뿌리 하나, 가다가 또 뿌리 하나

바다와 육지의 경계

연두로 깁는 봄날

 

그런 봄날,

다 식은 불턱에도 온기가 돌아

휴대폰 액정 속에 자맥질 하는 바다

자잘한 이파리들이 돛배처럼 끌고 간다

 

어쩌다 맑음

 

바다에 반쯤 잠겼다 썰물 녘 드러나는

애월 돌염전에 기대 사는 갯질경같이

한사코 바다에 기대

서성이는 생이 있다

 

그렇게 아흔아홉 세밑 겨우 넘겼는데

간밤엔 육십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아기 젖 물리란다며 앞가슴 풀어낸다

 

사나흘은 뜬눈으로, 사나흘은 잠에 취해

꿈속에서도 꿈을 꾸는 어머니 저 섬망증

오늘은 어쩌다 맑음

요양원 일기예보

 

 

                                    * 문순자 시집 어쩌다 맑음(황금알 시인선 209, 202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