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순자 시집 '어쩌다 맑음'
♧ 시인의 말
이젠
놓아 주마
가난한 내 시편들아!
2020년 감귤꽃 환한 봄날
문순자
♧ 갯무꽃
구엄리 갯무꽃은 혼자 피고 혼자 진다
툇마루 걸터앉은 구순의 내 어머니
한 생애 끌고 온 바다
처얼~썩 철썩 처~얼썩
대물릴 게 없어서 바다를 대물렸나
비닐하우스 오이 따듯 덥석 따낸 해녀증
큰올케 노란 오리발
허공을 차올린다
삼월보름 물때는 썰물 중의 썰물이라
톳이며 보말 소라 덤으로 듣는 숨비소리
한 구덕 어머니 바다
욕심치레 하고 있다
♧ 개구리발톱꽃
이대로
봄 한철을
폴짝
건너뛰고 싶다
경칩보다 날 먼저 찾아온 알레르기성비염
오름길
재채기하다
톡
터뜨린
흰 얼룩
♧ 길마가지나무
소나기 쓰윽 훑고 간
한경면 청수곶자왈
열에 아홉 사람은 영락없이 놓친다는
그 꽃을 보러 왔다가
하마 나도 놓치겠네
그다지 예쁜 것도
눈에 띄는 것도 아닌데
길마가지 길마가지 소잔등 길마가지
봄이 채 오기도 전에
하마 그대 놓치겠네
♧ 흰 접시꽃
이제는 너를 그냥 놓아줘야 할까 보다
내리 딸 둘을 낳자 사흘이 멀다 찾아와
괜찮다, 괜찮다 하시던
시어머니 눈칫밥 같은
어디서 구했는지 흰 접시꽃 세 뿌리
벼슬 붉은 장닭 넣고 삼세번만 고아 먹어라
서둘러, 꽃 지기 전에
그래야 약발 받는다
그 여름 바람 타던 아들 낳는 비법들
때마침 할망당에 비손하는 접시꽃
꼭 무슨 빚쟁이처럼
여태껏 따라 다닌다
♧ 갯메꽃
똥깅이도 마다하는 돌염전 가장자리
가다가 뿌리 하나, 가다가 또 뿌리 하나
바다와 육지의 경계
연두로 깁는 봄날
그런 봄날,
다 식은 불턱에도 온기가 돌아
휴대폰 액정 속에 자맥질 하는 바다
자잘한 이파리들이 돛배처럼 끌고 간다
♧ 어쩌다 맑음
바다에 반쯤 잠겼다 썰물 녘 드러나는
애월 돌염전에 기대 사는 갯질경같이
한사코 바다에 기대
서성이는 생이 있다
그렇게 아흔아홉 세밑 겨우 넘겼는데
간밤엔 육십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아기 젖 물리란다며 앞가슴 풀어낸다
사나흘은 뜬눈으로, 사나흘은 잠에 취해
꿈속에서도 꿈을 꾸는 어머니 저 섬망증
오늘은 어쩌다 맑음
요양원 일기예보
* 문순자 시집 『어쩌다 맑음』 (황금알 시인선 209, 202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