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월간 '우리詩' 6월호의 詩와 '분홍찔레꽃'

김창집 2020. 6. 8. 12:10

바람의 발자국 - 김시림

 

그물무늬 신발을 신고

비릿한 갯내음 풍기며

물 위를 떠돌다가

 

모래톱 둔덕에

물결모양으로 가지런히 잠든

바람의 발자국들

 

그 발에 가만가만 입 맞추는

노랑나비

 

피어나는 갈대꽃에

좀 전에 앉았던

 

새만금 은월 김혜숙

 

십구 년 걸려 바다를

두 토막을 냈네

그 가슴골을 가로질러

군산에서 변산 새만금

 

방조제 두 물막이로

두 바다가 생이별했네

 

물 빠짐이 멀어지면서

마을 앞 갯포가에 밀물과

이별한 지 오래라

조개들의 노랫가락 멎었고

 

가끔 제 살을 내주기도 하는

실성한 온 가족이 시름시름

앓다가 갔네

 

생이별의 목마른 그리움

가까이 있어도 서로 애가 타

방조제의 물막이가 열리는 날

서로 마주 보며 한나절을 울었네

 

내 안에 그와 재회한 것처럼

새만금의 사랑이 해풍에

길고 긴 만큼 시리고 푸르네

 

역방향으로 가는 여행 - 조성례

 

기차를 탔습니다

역방향으로 앉으라 했습니다

어차피 미래는 볼 수가 없는 것

지나간 길이나 다시 보며 가자 했습니다

닳아진 등으로 밀면서 갔습니다

본 것을 계속 보며 달렸지요

어제가 밀려나오듯

풍경은 먹은 것을 꾸역꾸역 토해내고

뜯어서 버렸던 날들이 줄줄이 줄줄이 따라옵니다

마주 앉은 당신은 새로운 풍경에만 관심을 둡니다

당신은 나를 뜯어내고

나는 당신을 뜯어내면서도

새 달력을 벽에 걸듯

몸집이 불어나서 채워진 줄 알았습니다

당신의 푸른 이마가 떨어져 있고

빛나던 눈동자도 떨어져서 갓길에 구르고 있었습니다

내가 뜯어 낸 것들이겠지요

몇 장 안 남은 달력처럼 당신의 어깨가 얇아 보였습니다

들여다보면

가슴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 비명이 들락거리고 있을 것입니다

가끔은 신산히 불어오는 바람에

산 너머를 바라보며 꿈꾸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 닳고 닳은 길에

지금의 나를 이곳저곳에 세워봅니다

꿈도 미처 깨어나기 전에

미지의 세계에 도착했다는 방송 소리에

난 부스스 일어나서

다가올 길을 바라봅니다

 

한 수 깨우침 - 나영애

 

옥살이에서

탈출의 길 나섰다

풍경을 지나가는 길

갖가지 봄 냄새가 감격스럽다

 

곰삭은 인분을 만난 흙냄새

봄밭의 어머니를 모셔오고

연 방죽은 깊은 곳에 묻은

안타까운 사랑의 기억을 쑥쑥 밀어 올린다

사람 체취와 비벼진 낭만의 향기, 커피집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간절하다

 

유통기간 지나 삭아 없어진

사랑이라도 불러 지난날의 젊음을

종달새처럼 조잘대고 싶다

밤 고양이처럼 양양거리고 싶다

 

전염병에게 배운

한 수 깨우침

사람과 사물에 감사하라고

귀하지 않은 게 없다고

 

, 그 숱한 들썩임 여연

 

씨줄 날줄

겯고 결은 간절함

의 치명적 동거

 

어느 틈 온전하다

 

비릿한 바람과

암막 속의 사투

잔잔한 헐떡임의 공존

 

어느 결 촘촘하다

 

오는 길 가는 길

들고 나는 기적의 리듬

그예 가쁜 솟구침

 

별에게 묻다 - 이희국

 

비 개인 여름 계룡산 산장의 밤

어린 날 어머니와 함께 보던 하늘을 만났다

저토록 아름다운 별무리를

무엇에 쫓겨 지금껏 잊고 살았을까

 

은하의 물결에 멱을 감고 있는 별들

저 강은 어디로 흘렀다가 이곳에 왔는가

어느 곳 유람을 마치고 우리 다시 만나는가

 

때 묻은 도시는 미리내를 믿지 않고

죽어서 별이 된다는 말, 나도 믿지 않았는데

하늘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내 곁을 떠난 사람 모두 오늘밤 내 앞에 떠 있다

 

이제 과거는 색이 바래고

소중한 것도 하나 둘 빠져 빈손만 남았는데

반짝이며 다가오는 살가움

 

나의 자리도 그곳에 있는지

회백색 그 강에는 시름이 없는지

 

도시를 떠나오니 하늘이 보인다

 

들어보시라 권천학

 

시래기 된장국, 냉이 한 소쿠리, 쪽파 한 다발, 뒤안 마늘, 막걸리 한 잔

굴풋해지지 않은가

 

, 그냥, 맥없이, 있잖아, 거시기

뜨뜻해지지 않은가

 

할매, 엄마, 누님, 막내, 아가

눈물겹지 않은가

 

아부지, 맏이, 오빠

든든하지 않은가

 

 

                                        *월간 우리(20200638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