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6월호의 詩와 '분홍찔레꽃'

♧ 바람의 발자국 - 김시림
그물무늬 신발을 신고
비릿한 갯내음 풍기며
물 위를 떠돌다가
모래톱 둔덕에
물결모양으로 가지런히 잠든
바람의 발자국들
그 발에 가만가만 입 맞추는
노랑나비
피어나는 갈대꽃에
좀 전에 앉았던

♧ 새만금 – 은월 김혜숙
십구 년 걸려 바다를
두 토막을 냈네
그 가슴골을 가로질러
군산에서 변산 새만금
방조제 두 물막이로
두 바다가 생이별했네
물 빠짐이 멀어지면서
마을 앞 갯포가에 밀물과
이별한 지 오래라
조개들의 노랫가락 멎었고
가끔 제 살을 내주기도 하는
실성한 온 가족이 시름시름
앓다가 갔네
생이별의 목마른 그리움
가까이 있어도 서로 애가 타
방조제의 물막이가 열리는 날
서로 마주 보며 한나절을 울었네
내 안에 그와 재회한 것처럼
새만금의 사랑이 해풍에
길고 긴 만큼 시리고 푸르네

♧ 역방향으로 가는 여행 - 조성례
기차를 탔습니다
역방향으로 앉으라 했습니다
어차피 미래는 볼 수가 없는 것
지나간 길이나 다시 보며 가자 했습니다
닳아진 등으로 밀면서 갔습니다
본 것을 계속 보며 달렸지요
어제가 밀려나오듯
풍경은 먹은 것을 꾸역꾸역 토해내고
뜯어서 버렸던 날들이 줄줄이 줄줄이 따라옵니다
마주 앉은 당신은 새로운 풍경에만 관심을 둡니다
당신은 나를 뜯어내고
나는 당신을 뜯어내면서도
새 달력을 벽에 걸듯
몸집이 불어나서 채워진 줄 알았습니다
당신의 푸른 이마가 떨어져 있고
빛나던 눈동자도 떨어져서 갓길에 구르고 있었습니다
내가 뜯어 낸 것들이겠지요
몇 장 안 남은 달력처럼 당신의 어깨가 얇아 보였습니다
들여다보면
가슴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 비명이 들락거리고 있을 것입니다
가끔은 신산히 불어오는 바람에
산 너머를 바라보며 꿈꾸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 닳고 닳은 길에
지금의 나를 이곳저곳에 세워봅니다
꿈도 미처 깨어나기 전에
미지의 세계에 도착했다는 방송 소리에
난 부스스 일어나서
다가올 길을 바라봅니다

♧ 한 수 깨우침 - 나영애
옥살이에서
탈출의 길 나섰다
풍경을 지나가는 길
갖가지 봄 냄새가 감격스럽다
곰삭은 인분을 만난 흙냄새
봄밭의 어머니를 모셔오고
연 방죽은 깊은 곳에 묻은
안타까운 사랑의 기억을 쑥쑥 밀어 올린다
사람 체취와 비벼진 낭만의 향기, 커피집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간절하다
유통기간 지나 삭아 없어진
사랑이라도 불러 지난날의 젊음을
종달새처럼 조잘대고 싶다
밤 고양이처럼 양양거리고 싶다
전염병에게 배운
한 수 깨우침
사람과 사물에 감사하라고
귀하지 않은 게 없다고

♧ 숨, 그 숱한 들썩임 – 여연
씨줄 날줄
겯고 결은 간절함
‘첫’과 ‘끝’의 치명적 동거
어느 틈 온전하다
비릿한 바람과
암막 속의 사투
잔잔한 헐떡임의 공존
어느 결 촘촘하다
오는 길 가는 길
들고 나는 기적의 리듬
그예 가쁜 솟구침

♧ 별에게 묻다 - 이희국
비 개인 여름 계룡산 산장의 밤
어린 날 어머니와 함께 보던 하늘을 만났다
저토록 아름다운 별무리를
무엇에 쫓겨 지금껏 잊고 살았을까
은하의 물결에 멱을 감고 있는 별들
저 강은 어디로 흘렀다가 이곳에 왔는가
어느 곳 유람을 마치고 우리 다시 만나는가
때 묻은 도시는 미리내를 믿지 않고
죽어서 별이 된다는 말, 나도 믿지 않았는데
하늘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내 곁을 떠난 사람 모두 오늘밤 내 앞에 떠 있다
이제 과거는 색이 바래고
소중한 것도 하나 둘 빠져 빈손만 남았는데
반짝이며 다가오는 살가움
나의 자리도 그곳에 있는지
회백색 그 강에는 시름이 없는지
도시를 떠나오니 하늘이 보인다

♧ 들어보시라 – 권천학
시래기 된장국, 냉이 한 소쿠리, 쪽파 한 다발, 뒤안 마늘, 막걸리 한 잔…
굴풋해지지 않은가
응, 그냥, 맥없이, 있잖아, 거시기…
뜨뜻해지지 않은가
할매, 엄마, 누님, 막내, 아가…
눈물겹지 않은가
아부지, 맏이, 오빠…
든든하지 않은가
*월간 『우리詩』 (2020년 06월 384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