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문학' 여름호의 시와 자생란
♧ 몸 뒤집기 – 강영순
오늘 우리 둘째 손녀 해윤이
몸 뒤집기 성공했다고
며느리 들뜬 음성
카톡 영상
아주 천천히 느긋이
봄날 꽃봉오리 벌어지듯
몸 뒤집기
때가 되면 이루어지리라
성현의 말씀
기특하고 갸륵한 저 모습
감회가 별나서
아껴둔 산채 꺼내
무치고 볶고 지져서
모처럼 환한 마음
축하주 한 잔
♧ 수양버들 – 국중홍
봄바람 분다
날리는 긴 머리칼
휘휘 붓질하며
물 위에 그림을 그린다
화폭에 다소곳이 앉은 물풀
살아 움직이는 버들
바람 따라 흔들리다가도
잠잠히 고요해지면
눈 감고 가다듬는
저 여유
닮고 싶다
♧ 개망초꽃 - 김귀녀
길가 풀숲
빈 집에
바라보는 이 없어도 핀 꽃
당신 있는 곳이 환한 것처럼
난, 당신에게
곁에 오래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눈이 부시도록 고운 꽃은
아니지만
함께한 당신에게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허허로운 사람끼리 기대어 살자구요
내일이 올 때마다
기척하며 살자구요
♧ 무아의 그늘에 앉아 - 김내식
비탈진 산 오르내리다
나무그늘에 앉아 두 눈 감고
숨을 고르니
땀구멍을 열어 놓고 치솟던 체온
갑자기 어느 순간
서늘하다
실눈 지그시
무아의 경지에 문고리 잡고
이승을 다시 보니
산벚나무 꽃잎이 떨어진 자리
나비 한 마리
날아올라
이름 모를 들꽃으로
너울너울
극락이 어디에 따로 있다
살아있는 내 마음
중심인 것을
♧ 밤빛 머리 새 떼 - 김영자
폭우가 끝난 후
7월 초 장마 끝에서
축축한 바람을 걷어내며
저녁 햇살을 몰고 온
밤빛 머리 새떼
나뭇가지에 앉아 노을을 몰고
편안한 밤을 위해
작은 날개를 저리 열고 있는가
오늘밤에는 숲이 걷는 소리 들으며
밤빛 머리 새떼의 노래를
내 손등 푸른 정맥 속으로 흐르게 할까
나팔꽃 한 송이씩 피어내는 담담한 힘을
* 『산림문학』 2020년 여름호(통권38호)에서
* 사진 : 위에서 차례로 키다리난초, 갈매기난초, 금난초, 대흥란, 잠자리난초, 은난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