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김정서 시인의 시 '저녁해' 외 2편

김창집 2020. 7. 28. 02:33

저녁해 - 김정서

 

저 벗은 몸 좀 보아

혼자 빨갛게 달아올랐네

빛 옷 구름에 다 적시어

노을 커튼 치고서

뒤로 살살 숨어

산에 스오옥 빠지네

 

알몸 품은 산허리

어질어질 보라색 경련 일어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속눈썹 내리깔고

어둠만 내쉬며 돌아앉네

 

눈 감아 버리네.

 

더덕

 

가는 싹줄에

아래로 매달린 족두리

꽃이었던가!

얼기설기 붙은 잎 섶이라도 여미었나

땅심에 길들여져

다랑논 비늘 같은

돋을새김의 상흔들이

심란하다

 

고단한 겉살 걷어내니

백삼이라 했던가 하얀 속살에

저며 나는 뽀얀 진액

단내인가 쓴내인가

 

찐득이는 밤낮을 닦아내며

정수리부터 갈라보니

가슴 아래 길게 박힌 검은색 옹이

!

너 어미였구나.

 

가랑잎

 

내려놓고 비워간다는 것은 별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더는 부여잡을 한줄기 앙금이 없어질 때

스스로 내세우는 마지막 자존심이다

등 시린 바람이 건듯 할 때부터

눈을 감았거나 가늘게 뜨거나

세상만사를 알고 있던 팔월의 보름달이

불우리를 만들며 크게 한번 웃어줄 때부터

목멜 것 같던 설움들도 울대 크게 삼켜지더니

문득 내속에 있던 별을 들여다봐지더라

내려놓음의 숙연한 아름다움

달이한번 숨을 내쉬면

땅이 한번 숨을 들이쉬듯이

바람 없는 파문으로 스스로 내려오면

별빛이 한번 반짝인다는 것을

! 붉은 노욕마저 놓아야 할 때 알게 되다니

그림자도 동행하지 않는 가난한 마음일 때야

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뒤집고 굴러도 거칠 것 없는 단호한 빈손일 때야

나만의 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사르륵그 얇은 소리.

 

 

                                          *월간우리202007(통권385)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