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김수열 시 '오리' 외 4편

김창집 2021. 2. 28. 12:04

오리

 

 하얗고 비리비리한 어린 아들이 안쓰러운 어머니는 서문다리 아래서 물놀이하는 생오리 한 마리 사다 다리 묶어 처마에 매달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대가리쪽으로 피가 쏠려 파닥이는 그걸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신돌에 갈아 날이 선 부엌칼로 탁, 목을 치자 꽥, 떨어져 나가면서 한 줄기 붉은 것이 사기그릇에 쫙, 쏟아졌다

 

 굳지 말라고 어머니는 그것에 활명수 섞어 새끼손가락으로 휘휘 저었고 아들은 코 막고 눈감아 꼴깍꼴깍 단숨에 받아 마셨고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붉은 입술에 동고리사탕 하나 쏙, 밀어 넣었다

 

개역

 

 탈곡 마치고 수매 끝나면 말가웃 보리 볶아 등짐 지고 방엣공장 갑니다 볶은 보리에 당원 넣고 기계는 돌고 돌아 탈탈탈탈 뽀얀 개역이 나옵니다 보리 한 되로 기계 돌린 값 대신하고 머릿수건 풀어 탁탁 먼지 털고 집으로 옵니다 개역 너댓 술 넣은 양푼 보리밥 가운데 놓고 삼방에 둘러앉아 달그락달그락 개역밥 먹습니다

 

 개역물 만들어 4홉들이 병에 담아 먼 바당에 갑니다 물질은 밥심인데 밥차롱 대신 개역물 병에 담아 먼 물질 갑니다 물숨이 찰 때까지 저승바닥 훑고 숨의 끝자락에 이승으로 올라 긴 숨 몰아쉽니다

 

 나 살았수다, 호오이-

 나 이디 있수다, 호오이-

 

 잠시 테악에 몸 얹혀 개역물로 주린 배 채웁니다 귀눈이 왁왁허고 한라산이 어질어질하여도 이승에 남은 것들 살리기 위해 병굽이 보일 때까지 저승으로 내려갑니다

 머리에 피가 쏠립니다

 

불면

 

 조천 김 아무개 시인 귤밭 컨테이너집에서 내일 오후께 일부 몰지각한 것들끼리 모여 집들이 빙자한 닭추렴이라는 눈물겨운 문자를 받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아, 따뜻한 우유에 소금 넣어 마셔도 멀뚱멀뚱 잠이 오지 않아, 새벽녘에야 병원에서 받은 알약 반으로 분질러 먹고 누웠는데 엎치락뒤치락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아

 

 이 저녁, 잘 익은 지슬과 소반에 둘러 앉은 벗들가 더운 김 모락모락 노계가 떠올라, 가는 길에 한라산을 살까 참이슬을 살까 손가락 구부렸다 펴고 다시 구부렸다 펴는데

먼 데서 장닭이 운다

 

민들레

 

-

봄바람 불어와

널 날려 보낼 수 있다면

 

네 가고픈 거기,

구멍 뚫린 돌담 너머

초가 위에 내려 앉아

작은 별이 될 수 있다면

노랗게 반짝일 수 있다면

 

이대로

납작 엎드려

밟히고 밟히다가

 

똥으로 살아도 좋겠다

흙이 되어도 좋겠다

 

이순

 

걸음이 불편한 어머니 손을 잡고

때로는 아버지 휠체어를 밀고

진료 대기실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우리는

멋쩍은 눈인사로 스쳐 지나지만

 

헐렁한 환자복 차림에

삼색 슬리퍼 신고 링거대 질질 끌면서

병원 구석 흡연실에서 어쩌다 만나

어디가 안 좋은데? 묻는 말에

그냥, 하고 어정쩡 고개 돌리는 우리는

늦가을 여섯 시처럼 스산하다

 

불현듯 날아든 동창생의 부고

담배만 한 모금 한숨처럼 길게 내뱉고

양미간 좁히면서 느릿느릿 띄엄띄엄

조의금 대신 전달해 달라는 문자를 남긴다

 

 

                                  *김수열 신작 시집 호모 마스크스(아시아, 2020)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제주의 백목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