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 무등이왓 사람들 - 배진성

김창집 2021. 3. 22. 22:44

 

무등이왓 사람들 - 배진성

 

# 큰넓궤

 

평화로 가는 길에 붉은 상사화

무리지어 피어난다

추석날 오후 큰넓궤 찾아간다

큰넓궤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해 추석을 어떻게 지냈을까

, 큰넓궤는

끝까지 눈을 감지 못한 어머니의 눈동자

길에서 나를 쏟아버린 어머니의 자궁

서늘한 바람이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싸늘한 정신이 가슴 속을 후벼판다

볼레오름까지 올라갔던 사람들

그들을 두 달 동안 지켜주었던

입구의 종나무

그 종나무와 어울려 살고 있는

단풍나무를 본다

홍단풍은 봄부터 붉고

청단풍은 가을에도 푸르다

, 입구가 너무 좁다

거꾸로 찍혀있는 발자국처럼 거꾸로 들어간다

흙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눈동자 속으로, 자궁 속으로

기어서 들어간다

멀리서 나팔소리 들려오고

어머니의 심장소리 들린다

어둠이 양수처럼 나를 감싼다 이 곳에서

붉은 상사화 지는 것도 잊은 채

두어 달 어머니와 함께 종나무로 살다가 나는,

 

 

# 발자국 밥그릇

 

눈이 온다 하늘이 온다

하늘의 식구였던 눈이 온다

하늘의 식구였던 하늘이 온다

눈이 쌓인다

하늘이 내려 쌓인다

큰일이다 큰일났다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오려거든

더 빨리 펑펑 쏟아 부어라

우리들이 벗어놓은

발자국 가득 쌓여 넘쳐버려라

거꾸로 벗어놓은 발자국이

차라리 하늘이 되어버려라

큰넓궤에서부터 따라오는 발자국이

자꾸만 우리들의 목숨을 따라오고 있다

왕오름을 지나고

이스렁오름을 지나고

어스렁오름을 지나고

산짐승도 내려가 텅 빈 볼레오름에 다 오도록

우리들의 발자국은 하늘이 되지 못하는구나

고봉밥이 되지 못하는구나

발자국 밥그릇에 하늘을 다 담지 못하는구나

, 존자암의 염불소리도

부처님께 올리는 삼시 세 때 공양도

우리들의 발자국 그릇을 다 채워주지는 못하는구나

하늘의 눈꽃만 지상에 피어나

참나무들의 겨우살이 열매 눈빛이 더욱 붉어지더니

덜 채워진 하늘이 결국 붉게 엎어지고 마는구나

 

# 헛묘

 

  정방폭포로 간다 정방폭포 앞바다로 간다 태평양으로 간다 혹시, 아는 사람이 뼈 한 조각이라도 가져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고향으로 간다 동광리로 간다 무등이왓으로 간다 삼밭구석으로 간다 혹시, 살 한 점이라도 붙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또 다시 낭떠러지 위로 간다 절벽의 바위를 뒤진다 폭포 아래 바위를 뒤지고 물속을 뒤지고 바다 속을 뒤지고 바다 속 물고기들을 뒤지고 물고기 뱃속을 뒤진다 혹시, 숨결 하나라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허공 속을 뒤진다 더 높은 하늘을 뒤진다 구름 속을 뒤진다 빗방울 속을 뒤진다

 

  뒤지다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이 지상을 떠난 뒤에도, 집 앞으로 몰려든다 죽어서도 몸을 찾지 못한 영혼들이 작은 단서라도 얻어 들으려고 찾아든다 이렇게 찾아와 밤새 이야기하는 영혼들을, 살아있는 사람들은 목백일홍이라고 말한다 백일홍 나무라고 말한다 배롱나무라고 말한다 그 곁에 있는 충혼묘지에도 백일기도하는 붉은 꽃이 있다 죽어서도 영혼을 찾지 못한 몸들이 있다 그리하여 여전히 순례를 멈출 수 없다

 

 

                                             * 계간 제주작가2020년 겨울호(71)에서

      * 사진 : 위에서부터 '지슬'에도 나오는 '큰넓궤 굴',  무등이왓 폭낭, 동광 헛묘,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