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화 시 '오래된 잠' 외 6편
♧ 오래된 잠 - 이민화
다섯 송이의 메꽃이 피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알리는 검은 적막을 깨고
돌담을 딛고 야금야금 기어올라
초가지붕 위에 흘림체로 풀어놓는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바람벽이
움찔 다리를 절면
마당가에 선 감나무도 키를 낮춘다
아버지의 귀가에서 나던 솔가지 타는 냄새
너덜너덜해진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수도꼭지
끄윽끄윽 울음을 뱉어낸다
산 그림자 마당으로 내려서면
거미줄에 걸린 붉은 노을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먼지 쌓인 잠을 쓱쓱 문질러 닦아내면
아버지의 오래된 시간이 푸석한 얼굴로 깨어난다
늙은 집이 메꽃을 피우고 있다
♧ 민들레
볕이 들지 않는 돌 틈에 끼어
노랗게 빈혈을 앓는다
날아오를 꿈이라도 꾸는 걸까
짧은 봄볕을 기억하며
불임의 땅에서
긴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한숨으로 시간을 말리고 피어났을
질긴 생명의 몸짓
노랗게 웃는다
내 발길 붙잡아 놓고
작은 손을 내밀어
사월의 푸른 안부를 묻는다
노란 꽃잎이 검은 잠을 끌어당긴다
♧ 봄에게 당하다
어디선가 그의 냄새가 난다
돌아보니
너도밤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내 몸이 흠뻑 젖는다
♧ 고향을 베끼다
연어의 사진을 본다. 거센 여울을 거슬러 오른다. 고향이라는 단어에서는 늘 비릿한 냄새가 난다. 20년 만에 찾아간 고향, 조심스레 고향이란 단어의 문을 열고 그녀는 국어사전 속에서 깊은 잠이 들었던 고향이란 단어의 먼지를 털어내고, 고향이란 단어에 새겨진 추억을 더듬으며 고향이란 단어의 냄새를 찾아 들어선다. 고향이라고 발음하면 머리에 소금 꽃을 피운 어머니가 맨발로 뛰어나와 볼을 비빈다. 그녀는 밤새도록 사전 속을 헤매다가 고향 페이지에서 잠이 든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데려다 놓고 그리움이란, 사랑이란, 바둑이와 감나무를 데려다 놓고, 미농지가 바람에 넘어갈 때처럼 슬며시 잠의 문턱을 넘다가 미농지처럼 잠이 든다.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어머니 목소리, 마당 가 감나무에 묶어 놓은 삽살개가 짖어대는 고향이라는 낱말의 페이지에서 깨어나 사전을 덮는다. 사전 속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온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나처럼.
♧ 데칼코마니
식구들 몰래 이사를 오신 어머니
언제부턴가 내 방 거울 속에 숨어산다
번지르한 당신집 놔두고
항상 딴죽 걸던 내게 와서 얹혀산다
남편을 기다리는 늦은 시간이나
밀린 대출금 이자를 걱정하는 날에도
마흔 넘긴 자식을 걱정스레 보고 있다
오늘은 외출을 하는 모양이다
밝은 바이올렛 빛 파우더를 바르고
핑크색 립스틱으로 정성스레 입술을 그린다
장롱 깊숙이 걸어둔 옷을 꺼내 입고서
요리조리 뒤태까지 신경을 쓴다
작은딸 담임선생님 뵈러 학교에 간단다
노란색 프리지어 꽃다발을 주문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어미니, 멀뚱히 나를 쳐다본다
거울 속에는 어머니를 닮은 내가 세들어 산다
♧ 식구
그녀의 가슴 속에 붉은 점이 다섯 개 있다
스물둘에 하나 생기더니
삼 년이 지나 두 개가 되고
서른이 되었을 때
점은 다섯 개로 늘어났다
바람 잘 날 없다
♧ 거짓말
부자로 살던 박 씨가 죽었다
그의 젊은 아내는
혼자서 어떻게 사냐며
저도 데려가라며 소리 내어
슬피 운다
손가락질도
뒷담화도
상관없다는 듯
봄볕 받아먹듯
따박따박 끼니를 챙겨 먹는다
* 이민화 시집 『오래된 잠』(황금알, 201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