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항신 시 '소확행' 외 5편
♧ 소확행
아침 늦은 시간만큼 뒤척이다
부엌으로 가는 그녀
하루 일과처럼
밴드에게 인사하고
눈에 약물 넣고
칼슘 찾아 먹고
방긋 웃어주는 노란 초
거실에 동거하는 안슈리움 제라늄 행운목
마음 담아내는 요리를 하며
무엇을 어떤 맛으로 만들어 볼까 궁리하며
그래 이 순간
내가 설 수 있어 행복하고
만질 수 있어 행복하고
만들 수 있어 행복한 실세實勢가 아닐까
그냥 행복이라 하자
♧ 서흘포에 바람이 분다
물이 뒤척일 때마다 짠내음 털어내던
서흘포 마을에 싹쓸 바람이 블었다
소 떼 지나는 광장 들어서면
바다와 모래 동산이 마주 보는 섬
주낙 가는 아들 바라보며 서 있던
어머니 자리
밭일 가던 어미 쫓은 세 살배기 어린 것은
먹장구름 옴팡마을 휘감던 칠월 태풍이 쏟아지던 날
아이는 모래섬 따라 삼만 리를 돌다 왔을
어미는 바다로 간 어부 안이(安易)가 궁금했을
증손자 풀 장삼 덮어 잠재우던 골육의 정은
사라호도 어쩌지 못한 하늘의 천명이었으리
♧ 아이콘택트
-기적이라는 간절함으로
시간을 잃어가는 남자와
기억을 잃어가는 여자
마지막 웃음과 눈물의 한 줄기 빛에
그 작업에 물들다
무언의 빛은 간절함으로 다가서고
<지금 이 순간>* 막이 오르기도 전에
뇌종양이라는 친구와 투병하며 할머니와 함께 가는
인간극장 파노라마
아들도 없이 엄마도 없이 굴곡진 삶은
오직
다만
기적이라는 간절함으로 바라봐야 하는
너와 나처럼
지금 이 순간
모노드라마 속에 안무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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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 애월, 결이 곱다
파도는 부드러운 혀를 가졌으나
거친 절벽을 만든* 신엄의 오르막길
오고 가다 미련 버리지 못해 서성인다
올려다 웃음 짓는 알작지 눈 마중은
시간과 공간 넘나들다 아이들 눈 마중되고
제주어 배와 보게마씀
이
라
는
파도는
밀려왔다 자그락자그락 말을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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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정군칠 시인의 – 달의 난간- p.44. 첫줄 차용
♧ 라면의 힘보다 더 외로운 환희
-만학도의 길
영실에서 윗세오름 따라
라면의 힘 믿고 걷고 걸었다
후루룩 후-우 후-우 쩝
사발면 참 맵다
학사논문 써보고 나도 시인되겠다며
정지용 님 발자욱에
눈물의 환희 찍어본다
♧ 하늘과 바람과 빛, 그리고
오늘, 모처럼, 원하던,
진정한 가을 하늘아래
노랑, 하양, 잿빛들인
나비의 향연과
노랑, 보라, 주황의 꽃에
내가 물들다
얼마나 오랜만일까
정녕 못 보고 떠날 번했던
순간과 시간과 날
* 김항신 시집 『라면의 힘보다 더 외로운 환희』(도서출판실천,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