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작가' 2021 여름호의 시조
♧ 안나에게* - 김연미
하얀 연기 속에서 초신성을 만났죠
암흑보다 더 큰 빛
눈을 멀게 했어요
산산이 조각나버린 슬픈 운명의 내 궤도
당신의 범위 안에서 공전하고 싶어요
돌연변이 불륜도 유전이 되나요
사랑을 복제해 줘요
꽃이 피게 해줘요
우주의 호흡으로 나를 수렴해줘요
평행선 철로 위에 검게 깔린 복선처럼
당신의 블랙홀까지 따라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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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여주인공
♧ 맴섬의 아침 - 김영란
도무지 네 문장은 이해할 수 없었어
몇 번 남은 봄날인가 헤아릴 새도 없이
마지막 땅을 딛고서 시작을 꿈꾸었지
어디서나 해는 지고 우리는 이별하는데
밤새워 써내려간 속울음의 이야기들
핏발 선 문장 몇 개가 두서없이 떠다녔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계절은 흘러 흘러
아껴둔 사랑들이 제자리를 찾을 무렵
섬은 또 섬을 만나서 눈부시게 빛났지
♧ 어떤 꽃잎 - 김영숙
의귀리 현의 합장묘 몸살 앓는 꽃 있대요
치레한 돌담 아래 젖가슴 탱탱한 꽃
만삭의 봄까치꽃이 유선乳腺 또 푸르러요
총 맞은 그 아주머니 해산달이었대요
아, 당겨진 배 위로 별이 졌을 거예요
두 아들 꼭 쥔 손에는 기도로 뜨거웠겠죠
금어禁語의 시간 지나 자꾸만 돋는 혀
‘무사 죽였댄 헙디과 무사 죽였댄 헙디과’
출근길 나를 붙잡고 파랗게 떠는 꽃잎
♧ 그냥 대껴붑서* - 오영호
어느 날
이른 아침
찾아온 문 선생 왈
시詩를 보는 눈이 깊지 못해서 그런지 어떤 작품은 열 번을 읽어도 무엇을 노래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이럴 때민 어떵허민** 알 수 있습니까? 그냥 대껴붑서
무릎을
‘탁’ 치며 하하하
앓던 이가 빠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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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져버리세요
**어떻게 하면
♧ 그래 - 이애자
쑥 한 줌 캐어다 부쳐내는 부침개
이 맛이지 뭐,
노릇노릇 익어가는 저녁밥상
사십을 함께 했으니 이런 땐 반죽이 딱 맞다
♧ 수산 유원지 - 장영춘
동네 마실가듯 다녀가는 바람결에
갇혀 있던 물들이 수면水面 위로 닿을 듯 말 듯
짜르르 은어 떼 햇살 저수지에 내린다
한때는 수산리 하동, 번지마저 묻히고
소금쟁이 지난 길에 물수제비뜨던 날
까르르 아이들 웃음 골목길을 맴돈다
그리운 것들은 늘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잔설 덮인 한라산이 한 발짝 다가서면
오백 년 곰솔나무의 굽은 등이 펴질 즘
만개한 추억들이 제방 위로 올라와
찰랑찰랑 꿈을 꾸며 손 맞잡던 친구여
수신자 주소도 없는 너의 안부를 묻는다
♧ 오빠와 누나 – 조한일
연상 남편을 오빠라
부르는 옆집 부인
연상 아내를 누나라
부르지 않는 뒷집 남편
오빠란
남자의 정체
알다가도 모르겠다
♧ 신도시의 밤 - 한희정
1
하천변 둔덕에 산수유꽃 지는 밤
치솟은 고층 아파트 빚투빚투 무성한데
형광색 가로등 아래 오고가는 페르소나
2
방풍림 삼나무보다 더 높아서 몇 층일까
세고 또 세어 봐도 자꾸만 놓치고 마는
밤새워 밑줄 그으면 저 꼭대기 가 닿을까
3
한번쯤 당당하게 별 볼일은 있어야지
그림자만 밟고 가다 고개 들어 쳐다본
희부연 열아흐레 달이 비죽배죽 웃는다
*시조 : 계간 『제주작가』2021년 여름호(통권 제73호)에서
*사진 : 산호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