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2021 여름호의 시조

김창집 2021. 8. 4. 00:12

안나에게* - 김연미

 

하얀 연기 속에서 초신성을 만났죠

암흑보다 더 큰 빛

눈을 멀게 했어요

 

산산이 조각나버린 슬픈 운명의 내 궤도

 

당신의 범위 안에서 공전하고 싶어요

돌연변이 불륜도 유전이 되나요

사랑을 복제해 줘요

꽃이 피게 해줘요

 

우주의 호흡으로 나를 수렴해줘요

평행선 철로 위에 검게 깔린 복선처럼

당신의 블랙홀까지 따라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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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여주인공

 

맴섬의 아침 - 김영란

 

도무지 네 문장은 이해할 수 없었어

 

몇 번 남은 봄날인가 헤아릴 새도 없이

 

마지막 땅을 딛고서 시작을 꿈꾸었지

 

어디서나 해는 지고 우리는 이별하는데

 

밤새워 써내려간 속울음의 이야기들

 

핏발 선 문장 몇 개가 두서없이 떠다녔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계절은 흘러 흘러

 

아껴둔 사랑들이 제자리를 찾을 무렵

 

섬은 또 섬을 만나서 눈부시게 빛났지

 

어떤 꽃잎 - 김영숙

 

의귀리 현의 합장묘 몸살 앓는 꽃 있대요

치레한 돌담 아래 젖가슴 탱탱한 꽃

만삭의 봄까치꽃이 유선乳腺 또 푸르러요

 

총 맞은 그 아주머니 해산달이었대요

, 당겨진 배 위로 별이 졌을 거예요

두 아들 꼭 쥔 손에는 기도로 뜨거웠겠죠

 

금어禁語의 시간 지나 자꾸만 돋는 혀

무사 죽였댄 헙디과 무사 죽였댄 헙디과

출근길 나를 붙잡고 파랗게 떠는 꽃잎

 

그냥 대껴붑서* - 오영호

 

  어느 날

  이른 아침

  찾아온 문 선생 왈

 

  시를 보는 눈이 깊지 못해서 그런지 어떤 작품은 열 번을 읽어도 무엇을 노래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이럴 때민 어떵허민** 알 수 있습니까? 그냥 대껴붑서

 

  무릎을

  ‘치며 하하하

  앓던 이가 빠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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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져버리세요

**어떻게 하면

 

그래 - 이애자

 

쑥 한 줌 캐어다 부쳐내는 부침개

이 맛이지 뭐,

노릇노릇 익어가는 저녁밥상

사십을 함께 했으니 이런 땐 반죽이 딱 맞다

 

수산 유원지 - 장영춘

 

동네 마실가듯 다녀가는 바람결에

갇혀 있던 물들이 수면水面 위로 닿을 듯 말 듯

짜르르 은어 떼 햇살 저수지에 내린다

 

한때는 수산리 하동, 번지마저 묻히고

소금쟁이 지난 길에 물수제비뜨던 날

까르르 아이들 웃음 골목길을 맴돈다

 

그리운 것들은 늘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잔설 덮인 한라산이 한 발짝 다가서면

오백 년 곰솔나무의 굽은 등이 펴질 즘

 

만개한 추억들이 제방 위로 올라와

찰랑찰랑 꿈을 꾸며 손 맞잡던 친구여

수신자 주소도 없는 너의 안부를 묻는다

 

오빠와 누나 조한일

 

연상 남편을 오빠라

부르는 옆집 부인

 

연상 아내를 누나라

부르지 않는 뒷집 남편

 

오빠란

남자의 정체

알다가도 모르겠다

 

신도시의 밤 - 한희정

 

1

하천변 둔덕에 산수유꽃 지는 밤

치솟은 고층 아파트 빚투빚투 무성한데

형광색 가로등 아래 오고가는 페르소나

 

2

방풍림 삼나무보다 더 높아서 몇 층일까

세고 또 세어 봐도 자꾸만 놓치고 마는

밤새워 밑줄 그으면 저 꼭대기 가 닿을까

 

3

한번쯤 당당하게 별 볼일은 있어야지

그림자만 밟고 가다 고개 들어 쳐다본

희부연 열아흐레 달이 비죽배죽 웃는다

 

 

                                *시조 : 계간 제주작가2021년 여름호(통권 제73)에서

                                                         *사진 : 산호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