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시조문학회 '팽나무 손가락' 발간
♧ 송악산 쑥부쟁이 - 강영미
간신히 굳은 딱지를 뗄까 말까 망설였어
여섯 살 변덕처럼 바람눈이 바뀌던 날
바닷가 절벽 위에서 물든 하늘을 보았지
해피엔딩 노을을 꿈꾼 건 아니었어
일렁이던 불씨를 재에 잠시 묻어두고
풀죽어 지낸 하루가 층층이로 쌓이던 걸
마침표 자리마다 불빛 새로 돋아나네
마스크 살짝 벗고 심호흡 한번 해 봐
보랏빛 입술자국이 압화처럼 찍혔어
♧ 천년 나무 - 고혜영
오래된 나무는 결코 고개 쳐들지 않아
우산 꼴 가지 가지 제 존심存心 지키면서
돌인 양
몸인 양하며
사람처럼 살더라
♧ 탈출기 - 김미애
사나흘 먹을 양식 끼니대로 쟁여놓고
결혼 이십 년 만에 혼자 떠난 삼박사일
나바론* 절벽에 서서
발
이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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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에 있는 절벽 이름.
♧ 홀로그램 – 김미영
혼자 스텝을 밟는 날들이 많아졌다
비로드 원피스를 입은 여인과 손을 잡고 줄무늬 양복과 엉덩이를 튕기며 꼭 당신을 닮은 장손 팔짱을 끼고 사춘기 손녀를 불러 강강술래를 뛴다.
아버지 십여 평 방에 사진들만 모여서
♧ 사는 맛 – 김미향
나도 염치가 있주
매번 얻어 먹으민 되어?
화장실로 쫓아와서
내 손에 전해주는
꼬깃한 지폐 몇 장을
어거지로 받았네요
낼모레 일백 살을 눈앞에 둔 우리 엄마
막국수도 같이 먹어 맛이 너무 좋다시네
볼우물 오물거리며
이게 사는 맛이주
♧ 그림자 – 김선화
마음이 어두운 날 선명하게 들어온다
빛과 어둠 함께여야 보이는 너란 존재
날 닮은 그림자 하나 구김살이 펴졌다
무표정 텅 빈 얼굴 길 위를 흘러간다
펼쳤다 오므렸다 너와 나 한 몸이다
동백꽃 마음보자기 주인 만나 붉었다
♧ 민들레의 꿈 – 김순국
1차 줄기 마른 꽃대궁 하얀 털실 뽑는다
한 점 털실 거미손들 손에 손 맞잡은 집
투명집 간판 식구들 하얀 궁전 눈부시다
원으로 껴안아서 며칠 밤 지낸 친구
둥글게 빛나던 시간 영글어진 깃털들이
손 놓고 자리를 뜨며 하얀 꿈에 날아간다
♧ 골목책방 - 김연미
당신은
잠에서 깬 아이처럼 작아져요
밑줄 친 어느 날이 골목을 돌아가면
맨 끝에 진열된 여름
아삭아삭 읽어요
부재중인 사랑보다 달콤한 게 있을까요
받침 없는 의자가 반짝이는 간판
내가 쓴
눈물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죠
바람의 활자들이 편지처럼 자라는
책방
초록빛 그늘 자락 꽂혀진 정오쯤에
오래 전 당신이 썼던 나를 두고
갈까 봐요
*2021 젊은시조문학회 작품집 『팽나무 손가락』통권 제7호에서
*사진 : 교래리의 팽나무(2020.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