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젊은시조문학회 '팽나무 손가락' 발간

김창집 2021. 8. 6. 00:06

송악산 쑥부쟁이 - 강영미

 

간신히 굳은 딱지를 뗄까 말까 망설였어

여섯 살 변덕처럼 바람눈이 바뀌던 날

바닷가 절벽 위에서 물든 하늘을 보았지

 

해피엔딩 노을을 꿈꾼 건 아니었어

일렁이던 불씨를 재에 잠시 묻어두고

풀죽어 지낸 하루가 층층이로 쌓이던 걸

 

마침표 자리마다 불빛 새로 돋아나네

마스크 살짝 벗고 심호흡 한번 해 봐

보랏빛 입술자국이 압화처럼 찍혔어

 

천년 나무 - 고혜영

 

오래된 나무는 결코 고개 쳐들지 않아

 

우산 꼴 가지 가지 제 존심存心 지키면서

 

돌인 양

 

몸인 양하며

 

사람처럼 살더라

 

탈출기 - 김미애

 

사나흘 먹을 양식 끼니대로 쟁여놓고

결혼 이십 년 만에 혼자 떠난 삼박사일

나바론* 절벽에 서서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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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에 있는 절벽 이름.

 

홀로그램 김미영

 

  혼자 스텝을 밟는 날들이 많아졌다

 

  비로드 원피스를 입은 여인과 손을 잡고 줄무늬 양복과 엉덩이를 튕기며 꼭 당신을 닮은 장손 팔짱을 끼고 사춘기 손녀를 불러 강강술래를 뛴다.

 

  아버지 십여 평 방에 사진들만 모여서

 

사는 맛 김미향

 

나도 염치가 있주

매번 얻어 먹으민 되어?

 

화장실로 쫓아와서

내 손에 전해주는

 

꼬깃한 지폐 몇 장을

어거지로 받았네요

 

낼모레 일백 살을 눈앞에 둔 우리 엄마

막국수도 같이 먹어 맛이 너무 좋다시네

 

볼우물 오물거리며

이게 사는 맛이주

 

그림자 김선화

 

마음이 어두운 날 선명하게 들어온다

 

빛과 어둠 함께여야 보이는 너란 존재

 

날 닮은 그림자 하나 구김살이 펴졌다

 

무표정 텅 빈 얼굴 길 위를 흘러간다

 

펼쳤다 오므렸다 너와 나 한 몸이다

 

동백꽃 마음보자기 주인 만나 붉었다

 

민들레의 꿈 김순국

 

1차 줄기 마른 꽃대궁 하얀 털실 뽑는다

한 점 털실 거미손들 손에 손 맞잡은 집

투명집 간판 식구들 하얀 궁전 눈부시다

 

원으로 껴안아서 며칠 밤 지낸 친구

둥글게 빛나던 시간 영글어진 깃털들이

손 놓고 자리를 뜨며 하얀 꿈에 날아간다

 

골목책방 - 김연미

 

당신은

잠에서 깬 아이처럼 작아져요

 

밑줄 친 어느 날이 골목을 돌아가면

맨 끝에 진열된 여름

아삭아삭 읽어요

 

부재중인 사랑보다 달콤한 게 있을까요

받침 없는 의자가 반짝이는 간판

내가 쓴

눈물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죠

 

바람의 활자들이 편지처럼 자라는

책방

 

초록빛 그늘 자락 꽂혀진 정오쯤에

오래 전 당신이 썼던 나를 두고

갈까 봐요

 

 

                             *2021 젊은시조문학회 작품집 팽나무 손가락통권 제7호에서

                                            *사진 : 교래리의 팽나무(2020.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