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정형무 시집 '닭의장풀은 남보라 물봉선은 붉은보라'의 시(3)

김창집 2021. 12. 15. 08:19

 

늦가을

 

빛바랜 털가죽을 걸친 털북숭이 사내가 허청허청 바위틈을 올라오더니, 부러진 정강이뼈를 노거수 아래 파묻고 나서

 

목에 두른 곰 발톱들이 차르르 술렁이도록 등허리를 펴며 워- 소리를 질렀다

 

해 지는 쪽은 핏빛 구름 무더기, 그 아래 끝없이 펼쳐진 싯붉은 가을숲을 바라보는 외짝 눈이 번뜩였는데

 

메아리가 되돌아오기도 전, 눈두덩에서 턱주가리까지 깊숙한 생채기를 따라 까닭 모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느 갠 날

 

구름은 어디서 피어나는가

 

배롱꽃 벌어

반나절

 

뭉게구름 어린 물가

피라미 떼 더불어

해어름

 

어둑발 내려

소나기 그쳐

 

하늘은 물빛

물은 하늘빛

 

뜬구름 좇아

두리번거리다 한평생

 

 

소리개

 

소리개가 떴다

소리개가 숲정이를 맴돈다

 

까마득히 사라졌다

어느 새 돌아오는 소리개

 

반가운 마음 들어

고개 젖혀 한참을 쳐다보다 말고

 

어릴 적 보던 그 소리개가 아님을

문득 알아차리자마자

 

산 너머 날아간 소리개

다시는 보이지 않는다

 

소리개는 언제나

빈 하늘을 수놓을 터이다

 

 

산새 소리

 

하산 길

봄 숲에 겨운 새

여울물 소리보다 시끄러웠네

 

쟉쟉쟉쟉 수비수비수

수수삐수후삐 도루룩

우피우피 히킥

따다다다 다다다

 

비야재재재 찌쿠룩

쁘이쁘이쁘이 찌아찡

푸르르르르 지악지악

우쭈쭈쭈쭈 찌컥찌컥찌컥

 

휙득휙득 휘빅득

타다르르르 타르르

뺙뺙뺙뺙 홱 호로록

즈이즈이즈이 즈이즈이즈이

 

새들이

일없이 지저귀겠는가

 

사람의 말도

저 소리에서 비롯되었을 테니

 

봄 산의 새잎만큼 하고많은 소리

이슥토록 따라 불러보았네

 

 

시마詩魔

 

시는물인가요불인가요는개인가요땡볕인가요

해와 달은 궁굴리고 별들은 궁창을 수놓을사

바늘 없는 낚싯대로 무엇을 낚아채려오

 

소금 내리듯 하던가요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나요

작달비로 퍼붓나요 번개처럼 닥치던가요

 

당신의 머리

당신의 가슴

당신의 촉수

당신이 불알

 

둥실 떠올라 구물굼실 사라지는 삼라만상을

어슷 베어 십자가에 세우려는 그대는

범종인가요 노리개인가요

 

마귀와도 타협하겠노라

부처의 뱃구레를 지르겠노라

가르랑대는 속 짐승을 어이하리오

 

이 한 목숨 흩으시든가 괴시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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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흩으시든가 괴시든가

 

 

 

종의 겉을 때리면

먼저 속이 운다

 

벅차오른 몸

터지지 않으려 바르르 떤다

 

종의 겉을 때리면

본디로 돌아가고픈 몸부림

 

부딪고 부딪쳐도 갈 곳 없는

소리의 정들이 아프다

 

명동鳴洞에 수북한 살비듬을 보라

 

 

                    * 정형무 시집 닭의장풀은 남보라 물봉선은 붉은보라(우리시 시인선 071, 2021)에서

                    * 사진 : 지난 일요일(2021. 12. 12) 서귀포시 시공원(詩公園)과 그 주변(수채화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