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향문학' 2021 하반기 제17호의 시(3)
♧ 다시 가을에는 - 윤봉택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저 하늘 바람 구름 빗방울
저 대지 바위 틈 나무 풀 꽃이
있어서라네
험한 저 길이
아름다운 것은
저분 걸음 없이
이뤄질 수 없는 길,
지금,
무엇이 두려우신가
돌아보면
하늘빛으로 열어 오시는
아이들 소리
걸음걸음으로
빗장 열어 주시나니
♧ 마른내(乾川)의 기원 - 강태훈
밤새 울던 천둥소리 멎었다
냇물이 넘쳐흘러서
포구로 달려와 소용돌이친다
오랜 기다림이 아쉬워서
이렇게 거품 물고 포효하는가
꽃 피고 새 우는 오름 지나
굽이굽이 흘러 왔지만
태양이 얼굴 내밀면
나의 운명도 쉬이 거덜 난다
사시사철 흐른다는 것
마른내의 간절한 비원
하늘이고 싶다
땅이고 싶다
샘물이라도 콸콸 솟아라
저리도 절절히 살아나는 염원.
♧ 연두에 홀리다 – 우은숙
연두에 홀리다
오랜 허기 때문이다
다가온 봄 한나절
생각이 머무는 곳
연하게
부풀린 입술
마음을 빼앗겼다
갓난 숲을 걸었다
자유를 배웠다
궁핍한 기억들도
반으로 접었다
푸르고
환하게 핀 잎
맘 그늘에 피었다
♧ 중도 3 – 오영호
떨어진 은행잎이
바람 따라 굴러가는
극락전 잔디밭을 걷고 있던 스님 ‘둥기 둥’ 거문고 소리에 걸음을 멈추자 큰 스님, 저 소리는 무슨 소리입니까? 조율이 잘 된 거문고 소리야 조율이란 무엇입니까? 줄을 너무 조이면 줄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으니라 딱 맞아야 최고의 소리를 낼 수 있느니라 행자도
조율된 거문고처럼 정진해야 하느니라
♧ 고향길 – 이창선
은하길 열어놓은
동심의 흙수원*에
은발의 사내가
옛길을 찾아들자
노변에
만개한 들국화
반겨주듯
나를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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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원 :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도원)리 2407번지 일대
♧ 포구, 큰갯물 - 김희운
바위배기 햇살 앉아 조잘조잘 바람 탄다
물질에 바릇잡이
이승 저승 출렁이는
자맥질 안캐 중캐 밧캐 칠성판 져 드나들고
사람 냄새 바다 냄새
채워놓은 불턱 온기
거친 파도 동여매고 순비기꽃 피워내면
물숨이 내어준 자리
또 한 생生을 닫고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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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대포동, 제주의 포구는 뭍으로부터 ‘안캐-중캐-밧캐’로 이뤄진다.
* 『혜향문학』 2021 하반기 제17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