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문학' 2021년 겨울호의 시(2)
♧ 자국 – 권순자
쓰러진 나무에
검은 불자국
숲을 지키느라 버티다가
할퀴인 자리
가만히 이끼가 자라는
남은 삶 한 움큼
검은 가슴에 초록빛 안개가
스물스물 자라
아직도 나를 먹여 살리나
어제의 꿈이.
♧ 사랑은 눈보라처럼 - 김수원
고속도로를 달린다
은빛 꽃보라로 휘날리는 눈보라
가슴속 강설량이 쌓여갈수록
폭설로 변하는 사랑,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랑인 양
속도를 낼수록 몰려와
온몸으로 부서지는 눈보라
너에게 향하는 내 마음 같다.
♧ 화형식 - 김혜천
흰 나비가 나풀거리며 내리는 폐교 운동장
메마른 한 무리의 짐승들이
엇갈리며 쌓은 나뭇더미의 불을 놓는다
작은 불꽃이
나뭇가지의 중심에서 조용히 일어나
일렁거리며 피어오르는 몽상의 밤
웅크린 짐승에게 점화된 불꽃이
푸르고 붉은 눈꽃에 올라타
허공에서 춤추며 소리친다
먼지들의 꿈을 안고
화형대는 진화의 동반자
깊고 어두운 동굴에서 뛰쳐나오라
삼킬 듯 일어난 불
지푸라기처럼 삼켜버린 자작나무 숲
습한 동굴을 빠져나온 나비 한 마리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진다
내면에 퇴적된 기억들을
흔적 없이 타지 않고는 다시 시작할 수 없다
재를 털고 훨훨 날아가는 나비
누구의 동굴에서 다시 불타오르나
♧ 겨울 강에서 - 임정현
밤새 살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 새벽 그는 목숨을 버렸다
쩡 쩡 쩡
차디 찬 가슴의
외로움은
다시 살이 되어 붙고
두터워지는 살
한 겹
또 외로움이 된다
몸을 버린 이 허허
쩡쩡거리는 득음
♧ 화백花柏 나무숲에서 - 최대승
엘리자벳,
찬바람 쓸고 가는 날은 눈 밖에 두었다
봄바람 불던 날은 심드렁하게 보았다
하얀 목련에 마음 뺏기고
화려한 벚꽃에 홀려 버렸다
연두가 녹빛으로 변해갈 즈음 빨간 장미
맥없이 중독당한 것은 사실이다
꽃양귀비 손짓하던 날
줏대 없이 벗어준 옷가지
벌거숭이 되어도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꽃 지고 햇살이 머리를 쪼아댄다
넋 잃고 접시꽃 뚝 떨어진다
퍼뜩 스치는 간사한 생각에
번쩍 정신이 든다
화백 나무숲, 화백花魄
간다 무작정 간다
땀줄기 손수건에 넘겨주고 숲으로 간다
선들선들 바람이 온다
약삭빠른 나를 용서하지 마라
그러나 이 순간은 허락해다오
옥잠화 품처럼 어우르게 해다오
나는 이미 너의 침향에 점령당한 포로
민낯이 되어버린 나약한 포로인걸
기신기신 잠들게 하누나
♧ 부부 산행 – 최영희
그저
오르는 가파른
산길
침묵 속에
산새 날고
강물 같은 바람소리만
정상에 올라
들숨
날숨 한두 번 쉬고
내려오는 길은
혼자인지…
둘인지…
각자의 숨소리만
감당할 뿐
* 『산림문학』 2021년 겨울 통권44호에서
* 사진 : 눈 내리는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