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산림문학' 2021년 겨울호의 시(2)

김창집 2021. 12. 29. 01:13

자국 권순자

 

쓰러진 나무에

검은 불자국

 

숲을 지키느라 버티다가

할퀴인 자리

 

가만히 이끼가 자라는

남은 삶 한 움큼

 

검은 가슴에 초록빛 안개가

스물스물 자라

 

아직도 나를 먹여 살리나

어제의 꿈이.

 

사랑은 눈보라처럼 - 김수원

 

고속도로를 달린다

 

은빛 꽃보라로 휘날리는 눈보라

 

가슴속 강설량이 쌓여갈수록

폭설로 변하는 사랑,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랑인 양

속도를 낼수록 몰려와

온몸으로 부서지는 눈보라

 

너에게 향하는 내 마음 같다.

 

 

화형식 - 김혜천

 

흰 나비가 나풀거리며 내리는 폐교 운동장

메마른 한 무리의 짐승들이

엇갈리며 쌓은 나뭇더미의 불을 놓는다

 

작은 불꽃이

나뭇가지의 중심에서 조용히 일어나

일렁거리며 피어오르는 몽상의 밤

 

웅크린 짐승에게 점화된 불꽃이

푸르고 붉은 눈꽃에 올라타

허공에서 춤추며 소리친다

먼지들의 꿈을 안고

 

화형대는 진화의 동반자

깊고 어두운 동굴에서 뛰쳐나오라

 

삼킬 듯 일어난 불

지푸라기처럼 삼켜버린 자작나무 숲

 

습한 동굴을 빠져나온 나비 한 마리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진다

 

내면에 퇴적된 기억들을

흔적 없이 타지 않고는 다시 시작할 수 없다

 

재를 털고 훨훨 날아가는 나비

누구의 동굴에서 다시 불타오르나

 

 

겨울 강에서 - 임정현

 

밤새 살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 새벽 그는 목숨을 버렸다

쩡 쩡 쩡

 

차디 찬 가슴의

외로움은

다시 살이 되어 붙고

두터워지는 살

한 겹

또 외로움이 된다

몸을 버린 이 허허

 

쩡쩡거리는 득음

 

 

화백花柏 나무숲에서 - 최대승

 

엘리자벳,

 

찬바람 쓸고 가는 날은 눈 밖에 두었다

봄바람 불던 날은 심드렁하게 보았다

하얀 목련에 마음 뺏기고

화려한 벚꽃에 홀려 버렸다

연두가 녹빛으로 변해갈 즈음 빨간 장미

맥없이 중독당한 것은 사실이다

꽃양귀비 손짓하던 날

줏대 없이 벗어준 옷가지

벌거숭이 되어도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꽃 지고 햇살이 머리를 쪼아댄다

넋 잃고 접시꽃 뚝 떨어진다

퍼뜩 스치는 간사한 생각에

번쩍 정신이 든다

화백 나무숲, 화백花魄

간다 무작정 간다

땀줄기 손수건에 넘겨주고 숲으로 간다

선들선들 바람이 온다

약삭빠른 나를 용서하지 마라

그러나 이 순간은 허락해다오

옥잠화 품처럼 어우르게 해다오

나는 이미 너의 침향에 점령당한 포로

민낯이 되어버린 나약한 포로인걸

기신기신 잠들게 하누나

 

 

부부 산행 최영희

 

그저

오르는 가파른

산길

 

침묵 속에

산새 날고

강물 같은 바람소리만

 

정상에 올라

들숨

날숨 한두 번 쉬고

 

내려오는 길은

혼자인지

둘인지

 

각자의 숨소리만

감당할 뿐

 

 

                                        * 산림문학2021년 겨울 통권44호에서

                                                    * 사진 : 눈 내리는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