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정호승 시인의 '사랑의 시학'

김창집 2021. 12. 30. 01:54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연어

 

바다를 떠나 너의 손을 잡는다

사람의 손에게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것이 그 얼마 만인가

거친 폭포를 뛰어넘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단지 한 마리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

울지 마라

인생을 눈물로 가득 채우지 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름답다

오늘 내가 꾼 꿈은 네가 꾼 꿈의 그림자일 뿐

너를 사랑하고 죽으러 가는 한낮

숨은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총총히 우리를 내려다본다

이제 곧 마른 강바닥에 나의 은빛 시체가 떠오르리라

배고픈 별빛들이 오랜만에 나를 포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밤을 밝히리라

 

 

폭포 앞에서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

떨어져 산산이 흩어져도 좋다

흩어져서 다시 만나 울어도 좋다

울다가 끝내 흘러 사라져도 좋다

 

끝끝내 흐르지 않는 폭포 앞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내가 포기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눈물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머무를 때는 언제나 떠나도 좋고

떠날 때는 언제나 머물러도 좋다

 

 

기차

 

역마다 불이 꺼졌다

떠나간 기차를 용서하라

기차도 때로는 침묵이 필요하다

굳이 수색쯤 어디 아니더라도

그 어느 영원한 선로 밖에서

서로 포기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갈대를 위하여

 

눈보라가 친다 사라지지 마라

눈보라가 친다 흩어지지 마라

눈보라가 친다 길이 끊어진다

이미 살아갈 날들까지 길은 다 끊어진다

 

눈을 떠라 눈을 떠라 눈보라 사이로

언뜻언뜻 넋들을 내비치지 마라

가지 마라 가지 마라 눈보라 사이로

혼절한 발자국들을 남기지 마라

 

사랑이 깊으면 증오도 깊다

눈보라 사이로 밤열차는 지나간다

피리소리는 끊어지고 바람소리만 들린다

쓰러지지 않아야만 뿌리는 뿌리다

흙을 움켜잡고 있을 때만 뿌리는 뿌리다

 

 

산을 오르며

 

내려가자 이제 산은 내려가기 위해서 있다

내려가자 다시는 끝까지 오르지 말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려가는 길밖에 없다

춘란도 피고 나면 지고 두견도 낙엽이 지면 그뿐

삭발할 필요도 없다 산은 내려가기 위해서 있다

 

내려가자 다시는 발자국을 남기지 말자

내려가는 것이 진정 다시 올라오는 일일지라도

내려가자 눈물로 올라온 발자국을 지우자

눈도 내렸다가 그치고 강물도 얼었다가 풀리면 그뿐

내려가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함께 올라왔다

 

내려가자 사람은 산을 내려갈 때가 가장 아름답다

산을 내려갈 때를 아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강요당하지 말고

해방되기 위하여 속박당하지 말고

내려가자 북한산에도 사람들은 다 내려갔다

 

 

            * 정호승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창작과비평사, 199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