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여는 '작가' 2021년 하반기호의 시

♧ 섬 동백 - 김광선
혹여 그 자식 살아있을지 모른다고, 외딴섬
바닷가 뼈만 앙상한 동백 한 그루
성성한 눈빛은
난리 통에 국방군으로 강제징집 당해서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아들 하나가 전부라서
뱃사람 아낙네 딸년 집
눈칫밥으로 해마다 붉게 핀 동백 한 그루
허나 기다림은 외로워도 행복해서
다 꼬부라진 허리 밭고랑 타고 앉으면
희미한 낮달에 갯바람만 들숨날숨
억새꽃 흐드러진 날 아흔아홉 기다림을 접은
동백 한 그루
이제야 물어물어 훈장과 상장이 찾아온단다.
어머니 흔적을 찾아 갯바람처럼
전사자로 밝혀져 부대에서 찾아온다는
아들의 흔적
파도처럼 일렁이다가
서로가 물살처럼 비껴가버린 섬은
매운바람 끝 자상(刺傷)처럼
온 섬 울컥울컥 낭자하게 동백꽃 핀다.

♧ 안쪽 - 신미나
범수 아버지는 국가유공자다 월남전에서 왼팔을 잃고 돌아왔다 그의 의수를 똑바로 본 적은 없다
범수 아버지는 범수 아버지여서 범수 아버지라고 쓰지만 그것이 사실이지만
종수나 상아 아버지로 바꿔 쓸 수도 있다
나는 그가 못 통 속의 못처럼 고개를 구부리고 걷는다는 사실을 비유로 써도 될까
추곡수매 공판장에서 쌀가마니를 찍을 때 그의 갈고리가 은갈치처럼 빛났다고 써도 될까
나의 비유는 도금한 훈장처럼 잠깐 빛나다 언어의 안팎을 뒤집어 다시 쓴다
범수 아버지가 아닌 것이 되어
범수 아버지가 범수 아버지로 가닿으려고
범수 아버지는 범수 아버지고 월남전에서 왼팔을 잃고 돌아왔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 똥을 푸면서 – 유승도
변소의 동을 푼다 20년 넘게 하다 보니 똥냄새도 맡을 만하다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개의 경지는 되지 못하지만 뭐 구수하게는 느껴지니 똥 푸기도 운동 삼아 할 만한 일이다
똥통은 돼지를 잡을 때 보았던 위장 속과 같다
일 년 내내 풀어지지 않은 단단한 덩어리를 바가지에 담으려 하는데 아들이 인터넷을 통해 중국에서 산 고무줄 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되팔기 위해 장터에 올렸다가 ‘그런 건 올리면 안 된다’는 경찰의 전화를 받고 똥통에 집어넣었다는 총이다 쇠구슬로 쏘면 사람도 잡을 위력을 지녔다
똥통에 내가 생각했던 똥만 있는 것은 아니란 걸 환갑을 넘긴 올해 들어서야 알았다

♧ 도서관을 가면 – 이영주
어제 s가 자살했고, 라는 문장을 노트에 썼다. 아버지는 나를 실패한 인생으로 보는 것을 좋아했다.
모든 것이 아파도 죽음만은 평온해. s의 유서는 본 적이 없다. 꿈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s는 아직도 도서관에 다니고 있다.
노인들이 도서관에 잔뜩 모여 있다. 긴 시간을 덜어내고 이제야 웃고 있다. 그들은 가진 것이 많고 도서관은 기울어져 있다. 멈추지 말고 전진하세요. 세월을 뛰어 넘어 도전하세요. 나는 언제나 반대로 말한다. 젊은이에게 위로받고 싶은 죽은 영혼들이 앉아 있다.
젊은 s는 자신의 젊음을 어리둥절해 했고 도서관에서 그녀의 치마가 벗겨졌다. 다들 좀 죽어! s는 난간에서 소리 지르는 것을 좋아했다. 문신의 개수가 늘었고, 고통 받을수록 웃었다.
도서관에서 망가진 육체를 견디며 그들이 책을 읽는다. 즐겁고 아픈 얼굴이다. 아버지는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신을 사랑한다. 신을 남자라고 생각한다. 모든 권위는 성별이 있다고 여긴다. 인간의 육체는 70프로가 물이라는데 s는 자신을 빠져나온 검은 물이 숭고한 페이지들을 물들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내가 죽었는데도 나의 물을 뺏어가는구나! s는 내 귀에 대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내 이름이 젖어가는 페이지를 조금씩 찢는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내게 유리컵을 건네며 죽은메 가까워질수록 물을 많이 마셔야 건강하다고 그들이 말한다. 기울어진 도서관이 점점 물에 잠기고 있다. s의 물은 끝이 없었다.

♧ 마스크 - 조향미
그만 입을 다물라는 말이다
너무 먹어대지도 말란 말이다
너희의 입이 문제였음을 모르겠냐고
마음대로 내뱉고 무엇이든 삼키고
저밖에 모르는 입이 재앙의 근원이었다
그토록 눈 귀를 막고 외면했냐고
어디서 고통스런 신음소리 새어 나오는지
누가 공포에 떨며 죽어가는지
세심히 들으라고 유심히 살피라고
밀림은 사라지고 바닷물은 넘치고
물난리와 불지옥의 대지
산과 바다와 마을과 도시에서
영영 사라지는 생물 종들
소나무며 돌고래며 솜다리꽃이며 나비며
우리는 시작일 뿐이다
만물은 연결되어 있다
이웃 생명체들 숨 몰아쉬는 경고 앞에
입이 칠십억 개라도 할 말이 없지 않냐고
오대양 육대주에서
바이러스는 활개를 친다
보여도 보지 않고 들려도 듣지 않고
입의 욕망만 받들다가
마침내 인간의 입은 봉쇄당했다
아직 말문도 터지지 않은 어린아이
마스크를 낀 채 아장아장 걷는다
아가야 네 가는 곳이 어디냐

♧ 감자 – 최은숙
목요 장터 나갔더니 싸고 좋더라.
감자 들여놓고 한 달도 못 되어
세상 떠난 노모의 목소리가 들린다.
몸도 편치 않은데 간병인까지 끌고 나가서는,
뭐든지 쟁여놔야 맘이 편하시지.
앉을 자리가 없어, 앉을 자리가.
핀잔하던 내 목소리가 들린다.
아파트 현관 감자 박스 옆에 앉으면
젊은 어머니가 산비둘기같이 먼 데서 운다.
흙 밑에 든 것들이 아직 손톱만 한데
줄기도 잎도 시들어 더 버틸 수가 없구나.
함석집 부엌에서 간장에 알감자를 졸이면서 혼잣말을 한다.
막내야 우리 둘이 도망쳐 버릴까.
산밭이 딸린 집을 팔았다.
등이 굽고 굽어 코를 땅에 대고 영영 잠이 든 집
도망치지 않은 집을 여섯 자식이 한 조각씩 나눠 가졌다.
막내에겐 조금 더 주었다.
감자를 넘기는 목구멍이 구륵구륵 산비둘기 흉내를 낸다.
* 한국작가회의 편 『내일을 여는 작가』 2021년 하반기호에서
* 사진 : 동백꽃 이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