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2021년 겨울호의 시(1)

김창집 2022. 1. 9. 00:15

 

분꽃, 하얀 강덕환

 

조국분단의 아픈 상처

문상길 중위의 흔적을 찾아 떠났던

그해 여름 안동, 그 시인의 집

전날의 까마귀 모른 제사상

음복술이 과했던 탓일까

이른 아침에 깨어 마당을 둘러보는데

하얀 분꽃이 하도 고와

그 시인에게 분양하자고 했더니

그해 가을 까만 씨앗 받아들고 바다 건너

이 섬에 왔던 거라, 분단의 땅 남쪽 섬

해군기지도, 2공항도 없는

비무장 평화지대로 만들려면

한얀 분꽃으로 뒤덮어버리자는 거야

 

겨울 동안 갈무리했다가 이듬해 봄

심었지, 싹을 틔우더라고 무럭무럭

여름이 들 무렵 봉오리가 맺힌 걸 보니

, 남부끄러운 얘길 해야겠네

하얀색이어야 할 분꽃이 줄무늬로 변색하고

같은 가지에서 붉은 꽃도 피는 거라

화들짝, 그 시인에게 메시지를 보냈지

씨앗이 제주해협을 건너오는 동안

바람피운 게 아니냐고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죄 역모로 다스려야 한다고

남귤북지(南橘北枳)는 알고 있었지만

북백남홍(北白南紅)은 듣기가 처음이라는 항의에

, 글쎄 차분히 더 기다려보라는 거였어

 

평화를 맞으려면 기다림이 필요한가 봐

기다렸지, 배신하지 않고 피어나더군

하얀 꽃들이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건 말건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를 두지 않아도

저녁밥 안치는 시간이면 활짝 피었다가

오므리고 피고 오므렸다 피어나며

맷집을 키워온 한반도 삼천리

분단의 나라에서 수줍게 수줍게 피어나

통일의 꽃으로 자라더라고

 

그래서 이참에 하는 말인데

남쪽 끄트머리 한라산 돌매화 데리고

상경하였다가 머뭇거리지 말고 비무장지대

철조망에 가로막혀 신음하는 금강초롱

같이 가자 손잡고 내쳐 달려

백두산 구름국화와 벗하면 어떨까

, 하얀 분꽃아!

 

 

천둥 강봉수

 

사름 모시켕 허는 사름

사름에게 충성허지 안 허켄 허는 사름

하늘이 알주

 

사름에 겁내지 않을 사름

겁줘도 겁먹지 않을 사름

땅도 압주

 

산천초목이 다 들어도

홀로 듣지 못허는 사름

ᄆᆞᆫ 아는데 지 스스로만 왁왁

 

이천이십일년 누리에 휘갈아 댕기단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사름이 운다

 

내 이놈

베락이나 맞아불라

우르릉 쾅

 

 

신축(辛丑) 십계명(十誡命) - 김경훈

 

다른 신과 우상을 섬기지 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마라

안식일은 당연히 거룩하게 보내야 하며

너희들 부모에게 지극정성 효도하라

살인을 하지 마라 간음도 하지 마라

도둑질도 하지 말고 거짓증언 하지 마라

남의 아내 남의 재물 절대로 탐내지 마라

삼성혈도 가면 안돼 정이월에 걸궁 안돼

늙어빠진 팽나무를 신목이라 우겨도 안돼

굿을 하는 심방은 사탄이니 멀리 하고

부처 앞에 불공은 더욱 더욱 안돼

산신놀이 세경놀이 인돼 시왕맞이 귀양풀이 안돼

제사도 안돼 설날추석 안돼 마을제도 안돼

풍수택일 안돼 관상도 안돼

뱀을 모시는 칠성제는 절대 안돼

국기에 대한 맹세도 안돼

안돼 안돼 절대 안돼!

 

 

어머니가 운다 - 김수열

 

모슬봉 동북 자락

대정 칠리 공동묘역 한참 걸어 외진 곳

재수 어미 송씨

옥색치마에 양단저고리 곱게 차려 입고

쪽진 머리 바람에 날리며 빗돌처럼 앉아

산방산 내려다본다

 

허접한 제주목사 비석은 골골마다 넘치건만

도탄에 빠진 섬 백성 원을 풀고 인정 바로잡은

내 아들 비석은 어찌하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고

재수야 어디에 있느냐

살았느냐 죽었느냐

내 죽어 황천 가면 만날 수 있는 것이냐

어허, 세상 사람들아

무죄한 내 아들 어디로 보내어 남의 애를 끊는고

 

옛 바람이 다시 불어온다

난바다 건너 떼구름이 몰려온다

산방산 머리 위로 우렁우렁 우레가 운다

모슬봉 마른 억새가 살아 오른다

재수야 어디에 있느냐

살았느냐 죽었느냐

 

 

빗소리 김순선

 

가림막 위로 떨어지는

다듬이 소리

어머니의 넋두리 같은

한숨 소리

 

잦아들었다 다시

살아나는

불꽃

삶의 굴곡 같은

 

평생

울 겨를도 없어

자정을 넘긴 시간에야

조심조심

가락의 끈을

잇는다

 

 

하찮은 기억의 항아리 김병택

 

태풍에 실려 온 돌멩이에 맞아

오래되고 잘 생긴 항아리가 깨졌다

많은 분량의 곡식과 함께

아련한 추억으로 가득한 유년이

장독대 주위에 와르르 쏟아졌다

 

깨진 항아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래가 좁고 배부른 새 항아리를

하나 구입하고는, 항아리 속에다

길에 뒹구는 대여섯 개의 유년을 담았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돌멩이에 깨진 항아리 속의 유년을

떠올리게 하는 아침에는 짐짓

마을의 골목길을 서성대며

혼자 긴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서 희망한 적도 있었다

누구든 흐린 날 새벽에 찾아와

이제는 내 하찮은 기억의

항아리, 잘게 깨부수어 주기를

 

 

                      * 제주작가2021년 겨울 통권 75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