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2022년 신년호 403호의 시(2)
♧ 크리킨디 벌새 - 이화인
별 하나가 어둠을 물리칠 수 없지만
별 하나가 새벽을 불러온다
크리킨디 벌새가 물어오는 물 한 방울이
아프리카 밀림의 산불을 끌 수 없지만
야성의 밀림을 천국으로 만든다.
보라!
나 하나 이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나 하나 버려 세상을 꿈꾸게 한다.
♧ 그녀는 – 한수채
시가 되기 위해 타락하는 것 같았지만
타락할수록 신과 가까워졌고
신과 가까워질수록
마저 잊어버렸다
신의 계획이었으므로
그토록 바라던 고아가 되어서야
자궁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 바람소리 - 김기화
솔잎 끝에 불어오는 바람소리 푸른 산골
방울소리 구르는 산새소리에
취하여 가을 길 걷는다
푸른 하늘, 무성했던 별빛
빛바랜지 이미 오래다
산봉우리마다 가을빛 우수수 떨어지고
굽이지는 물결도 굽이굽이 바쁜 오늘이다
인생은 하룻밤 꿈길
묵은 숙제하듯 끙끙 댈 일이더냐
축제하듯이 즐겁게 살자
사랑은 소리 없는 행복, 행여나
사랑의 무게를 저울질할 일이더냐
우리 인연의 언덕에서 사랑하며 행복하자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가끔은 세월을 희롱하며
공작이 날개를 펴듯
때로는 멋도 부리면서
남은 한세상 노래하며 살자
오두막집 사랑이라도
봄 나비 꿈길처럼 정겹게 살자.
♧ 협화음 - 신현복
덜컹덜컹 덜커덩 덜커덩
철교를 건너가는 밤국철 소리가 듣기 좋다
마찰음이 아니라 협화음이다
나도 저리 덜컹덜컹 덜커덩 덜커덩, 너라는
철교를 지나가고 있구나
한 생을 무사히 건너고 있구나
♧ 눈 - 권순자
3월에 펑펑 내려
마음 벽에 와 부딪친다
일상에 절은 내 권태를 흔든다
갈증을 재우는
싸늘한 입김
온 세상이 아득하여 현기증에 비틀거리는 순간
차가운 구름의 회오리
허공을 적시다가
후회의 살비듬으로 흩날린다
부딪쳐라
부딪쳐야만 깨어날 수 있는 습성이라면
이 봄날 다시 하얀 눈발 앞에서
얼어 깨어져라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장성호
-이방인 시편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서늘한 갈바람 분다
숲속에 한 가을여자가 다시 오지 않는 한 이방인을 그리워한다
밤낮으로 그녀를 찾아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그 사람이 어느 날 떠나버렸다
그녀는 속마음을 바람에 실어 전한다
그대여
그대가 떠난 후 아포칼립스가 온 것 같아요
내 세상은 빛 한 줄기 없는 암흑으로 변한 것 같아요
그녀의 가슴은 그에 대한 사랑의 아픔으로 죄어든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일도 그대와 이별한 일도 운명이에요
그녀는 숨을 깊게 내쉬며 눈앞에 그가 있는 것처럼 그에게 묻는다
그대여
우리가 생각과 행동을 바꾸면 그 운명이 바뀔 수 있을까요
우리가 모래시계를 되돌리면 그 운명이 바뀔 수 있을까요
숲속에 양희은이 부르는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들려온다
저기 쓸쓸한 들국화
다시 오지 않는 이방인을 그리워한다
* 월간 『우리詩』 2022년 신년호 403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