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김용길 시집 '서귀포 서정별곡'의 시(2)

김창집 2022. 1. 13. 00:52

 

제주의 봄 1

 

솜빛 안개 사이

봄볕이 길게 누웠다

 

능선 따라 끊어지듯

오솔길 이어지고

벼랑 끝

바다로 내려와서

물살에 감겨 돌았다

 

바다 속으로 길이 뚫렸다

흐물거리는 빛무리

터널 같은 길 이어 놓았다

 

길 따라

한바다 가운데

오름처럼 일어서는 섬

섬들

섬은 다시 산으로 올랐다.

 

 

한라산 노루 2

 

산을 업고 누웠다

먼 하늘빛

두 눈을 모두우고

날렵한 몸매

부끄럽게 열어

산의 精氣(정기)를 받아 안으면

전신의 핏줄들이

胎內(태내)로 감겨들었다

 

향내를 달리하는 계절

바람은 숲을 에워싸고

어디선가

전설을 물고 날으는 새가 운다

 

<五百羅漢(오백나한)>* 애절한 눈물

<靈室(영실)> 숲 붉은 안개로 피어오르고

 

<白鹿潭(백록담)> 고인 물이

바윗등 적셔 내려도

산그늘 어딘가에 감춰져 있을

仙女(선녀)의 날개옷

그 하늘거리는 옷자락

눈에 어리던가

 

노루는 안다

昇天(승천)의 꿈 한 가지

피워 올리기 위해

<아흔아홉*> 번도 더

계곡을 뛰고

달빛에 멱 감고 누워야 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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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나한 : 한라산 영실기암. 오백장군이라고도 함.(전설에 의함)

**아흔아홉 : 제주도에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계곡이 99개 있다고 함.

 

 

안개 숲에서

 

안개 숲 속

바람이 숨어들었다

사지를 오므리고

나뭇가지 이파리 틈

또는 풀잎과 풀잎 사이

어딘가로 숨어서

작은 휘파람 소릴 내었다

 

숲 속은

온통 휘파람소리다

숲과 계곡을 잇는

自生(자생)의 기운들

() 하나 온통 적셔 놓았다.

 

 

꽃뱀 가는 길

 

아무도 그대

가는 길 막지 못한다

 

저승빛 비늘 세우고

원죄의 혀침 널름거리며

그대 알몸뚱이로 가는 길

아무도 가로질러 막지 못 한다

 

이승에서의 인연과 그리움

속절없이 모두 끊어버리고

바람을 재우고

애증의 눈물 감추기까지

그대 맨 몸에 그려진 꽃 문신

아무도 가려내지 못한다

 

그대 가는 길

소리 없는 行步(행보).

 

 

가을 ()

 

나무들이 건조해지기 시작할 즈음

樹液(수액)은 흐르다 말고

딱지 입듯이

몸 안 구석구석

핏줄이 말라가고

 

이제 슬픔이나 그리움 따위

미련 없이 버리고

() 하나 얻어걸려 누웠으니

 

문병 온 가을 옛 친구

바둑돌 놓다 말고

-자네 일찍 자리 눕지 말게

 

친구 말씀

슬며시 베개머리에 감추고

친구 따라 일어나

 

산을 오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르막길에서 내려다보면

오십 줄 고개가

바로 엊그제

 

잡목 숲 사이

풀잎 베고 누우니

심장 안에 물소리

그대로 남아 있음이네.

 

 

겨울 숲

 

겨울 숲에 가 보아라

凍傷(동상)에 걸린

알몸의 숲에 가 보아라

 

맨살에 드러난

흉한 발톱자국과

부르터진 입술

딱지 입은 樹液(수액)

 

비인 겨울 숲에서는

바람을 재울 수가 없다

새들은 둥지를 떠났고

냇물도 바윗살에 얼어 붙었다

 

햇살이 비껴 달아난다

싱싱하게 푸르던 봄날의 사랑은

어디 갔는가

무성했던 신록의 그늘과

찬란한 가을날의 영광

그 빛나던 이름들은

이제 모두 어디로 흘러 갔는가

 

젊음은 자랑하는 게 아니다

기쁨이 아니다

푸른 열정으로 맺어진

진실의 열매

무서운 인내의 고통과

외로움의 떨림

고독의 아픈 생채기를 도려내고

아문 다음에 오는 것

 

겨울 숲에 가 보아라

, 여름, 가을의

허위에 찬 욕망

假飾(가식) 眞面(진면)이 어떠한가를.

 

 

                                 *김용길 제4시집 서귀포 서정별곡(빛남, 199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