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2022년 신년호의 시(3)
♧ 묵은지 – 방화선
식탁은 화려해야 한다는 지론
신김치는 찜이 제격이라며
깨작거리는 젓가락이
입맛은 100단이란다
40년 내공 손톱 날을 세우는
잠깐의 불편이 일탈을 상상해 보지만
앞치마 주머니에
머쓱해진 입술을 구겨 넣는다
믁은지 찜이 톡 쏘는 맛을 던진다
입 꼬리 올라간 등 뒤로
부푼 입술 삐쭉 내민다
♧ 바람의 길 – 김현주
큰 바람은 큰 바람대로
작은 바람은 작은 바람대로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제 길을 간다
누가 뭐라 해도
본래 그 모습대로
머물다 가는 힘
모든 것을 흔들고도
흔들리지 않는 바람
언제나
진실을 향해 불어가는
♧ 마법의 밤 - 김명옥
파두*가 듣고 싶은 밤
촛불을 드높이고
책을 크게 펼쳐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는 밤
그리움의 발소리 들려온다
그대여
마법의 램프를 가져오라
쓱쓱 문질러 요정을 불러내자
은쟁반에 가득한 요리도 맛보고
황금 궁전을 지어 달래 볼까
놓아줘야 할 인연들은 떠나갔으니
미래의 환상을 보여 달래 볼까
밤이 타오를 때
촛불처럼 춤추리라
오늘 밤 나의 주문은
카코 루키아(kako lukia)**
카코 루키아(kako luk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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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두 : 포르투갈 서정적인 민속 음악.
**카코 루키아(kako lukia) : 두려움을 쫓아내기 위한 마법의 주문.
♧ 그녀가 찾아가는 곳은 어디 - 조성례
그녀의 영혼은 벌써 저만치
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당신이 갈 곳을 가늠하는 듯
하염없이 창밖을 항한 몸은 뒤척임조차 없다
간호사나 의사가 귀에 대고 이름이 뭐예요
나순덕
멈칫거리던 줄넘기의 줄이 추울렁 아직 길을 떠나지 않은 흔적을 그린다
줄줄이 걸고 있는 링거에는
멀건 죽과 각종약이 한 호흡 때마다 한 방울씩 줄어든다
느낌도 없는 몸을 아침마다 커다란 기계를 들이대고 찍어가는 것은 그녀의 영혼을 줄이는 일
저 높은 곳으로 향하는 노자일까 아님 생명줄을
잡아주기 위한 방편일까
또한 촛불처럼 일렁이는 혼줄의 향방은 어느 곳일까
펄럭임도 없는 저 노인의 영혼,
오늘의 운세는 집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란다
♧ 셀라비 – 정형무
스리랑카 불가촉천민 어린이 불치병을 고쳐줄 정도로 독실했던 호흡기내과 선생은 아내의 협진 의사였다
암병동 복도에서 마주친 그가 “저도 이제 암환자에요”라며 웃었다는데, 두 달 뒤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 당신에게 묻는다 - 윤태근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만 내려가는 당신은 바보입니까?
일정한 꼴 없이 때론 연기처럼 사라지는 당신은 요술쟁이입니까?
투명한 이빨 으르렁대며 거대한 바위를 물어뜯는 당신은 맹수입니까?
해일이 되어 휩쓰는 당신은 무법의 정복자입니까?
여름 한낮에 시원한 분수로 치솟는 당신은 스무 살 청년입니까?
한 방울 눈물로 여린 내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당신은 예리한 칼입니까?
삶에 지친 후줄근한 밤.
욕조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 까무룩 의식 속에 문득,
자궁 안을 유영하던 양수羊水의 아늑한 본능.
진정 당신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십니까?
서른여섯 슬픈 나이로
선산에 누워 계신 어머니
바로 당신이십니까?
*월간 『우리詩』 2022년 신년 403호에서
*사진 : 강릉 석병산 설경(영상앨범 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