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문학' 2021 창간호의 시와 시조(2)
♧ 구강포 노을 - 김영란
-그리운 혜장*에게
나 그대에게 술을 가르치고 그대 내게 차를 가르쳤지
달빛에 젖어 들던 만덕산 그 숲길 야생 차 어린 차순 향내 그윽하였지 그 향내 따라서 그리움을 따라서 아침에 달이는 차 한낮에 달이는 차 깊은 밤 홀로 깨어 적적해 달이는 차 이생을 잘 건너라 그대 내게 내어준 차, 그대 떠난 길 위에 나 홀로 달이는 차
구강포 물결 따라서 차향이 번져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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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이 강진 유배 시절 벗이자 스승이자 제자처럼 지냈던 백련사 주지 스님.
♧ 서로 주름진 얼굴을 살펴보다 – 김정자
동창모임
오존주의보가 경고한 날
오래된 앨범에 지나가는 얼굴과
멈추는 얼굴들이 수다를 떤다
커피 잔에 가득 찬 수다는 식지 않고
높낮이를 따지지 않는 엉킨 사연들
말의 뼈들이 씨앗으로 날아가지 않기를
♧ 세화리 39 – 김지희
아버님 계실 적 바다는
지금보다 젊었을까
어머님 계실 적 하늘은
지금보다 젊었을까
울 안 문주란은
해마다
저리 흰 꽃을 피우는데
두 분
발자국 소리 기억할까
늙을 줄 모르는
바람소리만
마당을 서성인다
♧ 경의선 - 김진숙
녹이 슨 철새들이 열차를 끌고 간다
장단콩 콕콕 쪼다 임진 장단 봉동 개성 콩 한 쪽 입에 물고 열차를 끌고 간다. 토성 여현 금교 한포 삐걱삐걱 날아올라 철조망에 둥지 틀고 알을 낳던 새들아 평산 서흥 흥수 마동 어서어서 가자구나 사리원 계동 황해 황주 역포 너머 대동강 시린 물에 목축이고 가잔다 평양 서포 석암 만성 녹물 털어 한숨 돌리고 화통 속에 뿌린 뽕나무도 데불고 신안주 맹중리 운정 정주 끊긴 길에 침목 하나 얹고 또 얹고 다시 얹어 선첨 남시, 들릴까 칠십여 년 그 겨울 경적 소리, 이번 역은 신의주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어디쯤 가고 있나요
당신이 탄 열차는.
♧ 낭만 고양이 – 김항신
대문 입구에는 곱지도 않은 낙엽들이 안으로만 휘날린다
이끼들이 침점한 돌 벤치가 있고
닭장이 있고
그 위에 좀 더 헐거운 낭 사이로
양냥이 아지트가 있다
한 번은 닭장 위에서 한 번은 낭 덮개 틈에서
삼 대가 모여 낳고 크며 귀찮은 내 마음 쓸어주던
낭만의 가을 그 밤거리 낭만 고양이들
오늘
영롱한 엊그제의 눈동자가
애달픈
♧ 광대놀이 - 서근숙
각시탈을 썼다
탈 안에서 사랑하고
밥을 짓고
아이도 키우고
마당의 텃밭엔 고추를 심고
매실나무에 몰려드는 진딧물과 전쟁도 치르고
빨갛게 익은 고추
이젠 각시탈을 벗고 싶다
여행도 가고 연극도 보고
시 속에서 노는 법도 배우고 싶다
* 동백문학회 간 『동백문학』 창간호(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