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김애리샤 시집 '치마의 원주율'의 시(2)

김창집 2022. 1. 28. 00:02

 

뼈로 만든 바이올린

 

당신을 운행하던 뼈들은 모두

어젯밤에 캄캄한 하늘로 올라갔지

눈처럼 녹아 버린 당신의 살들에 묻혀

숨 막힐 듯 조용할 내일 밤 나는,

바이올린을 연주해봐야지

 

당신 심장에 핏줄들을 이어 붙여 만든

바이올린의 현을 조금씩 뜯어 먹으며

당신 이름을 불러 볼 거야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릴

핏방울들을 칭찬해야지

버리지도 잡지도 못했던 당신 속 암덩어리들을

예쁘게 연주해 줘야지

 

나의 연주는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적막해질 허공을 흔들어댈 거야

당신조차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텅 비어버린

심장 속 기억들을 어지럽힐 거야

찡찡거리며 경쾌하게 우주를 운행할 거야

그러는 사이 당신은 천사가 될지도 모르겠어

살면 살수록 쭈글쭈글 얇아진 당신 삶 속을

느리게 날아다는 가난한 천사

 

당신의 늑골들을 조각내 별자리를 만들고 싶어

그걸 밤하늘에 걸어 놓고 기도해야지

당신을 잊은 꿈이 이루어지길 연주해야지

너덜너덜 끊어져 버린 바이올린의 현처럼

밤하늘 길이 엇박자로 몰려다니는

뼛조각과 초라했던 시간의 운행을

지휘할 거야

 

모든 것들이 사라져 가는 오늘 밤

내게 다가오는 어떤 질문에도

최선을 다해 대답하지 않겠어

 

당신의 허락 같은 건 필요 없어

현이 끊어져 나갈 때마다 난 당신을 버릴 거니까

 

 

없다는 것

 

이젠 고아가 되어 버린 나

설날에도 추석날에도 찾아갈 친정이 없어

 

양지공원 부부 봉안당을 나오니

토끼풀이 지천이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엄마는

토끼풀꽃으로 보석을 만들었지

왕관도 만들고 목걸이도 만들고

반지도 만들고

그 빛나는 보석들을 다 내게 주었어

 

주렁주렁 보석들을 매달고

앞마당에서 춤추던 나

봉숭아도 과꽃도 백일홍도 함께 춤을 추었지

 

나비 같은 웃음으로만 나를 바라보던

엄마, 평생 제대로 된 금가락지 한 번

껴 보지 못했지

 

양지공원 마당에 핀 토끼풀꽃으로

엄마처럼 보석을 만들어

없는 엄마에게 주렁주렁 보석들을

달아주고 싶어지네

 

없다는 건

기억의 그림자를 주렁주렁 남긴다는 것

 

내가 만든 왕관을 내 머리에 올리고

엄마에게 얼마나 잘 만들었나 물어보고

칭찬받고 싶어

 

토끼풀꽃 같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흰나비 한 마리 폴폴폴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네

 

 

등에 새겨진 물고기의 뼈

 

그녀의 등에 새겨진 물고기의 뼈를 본다

 

샤워기에선 가느다란 파도가 쏟아져 내리고

물과 물 아닌 곳 욕실과 마루 사이

중간에 엎어진 물고기를 본다

벗겨지다 만 비늘처럼 엉덩이 아래쪽에 걸쳐진 바지

헐렁한 티셔츠는 등을 다 덮지 못했다

썩어 가는 물고기의 아가미가 그렇듯

그녀의 입은 반쯤 열려 있다

물고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녀의 귀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다

얼어버려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텼을 두 손이

쭈글쭈글해진 지느러미처럼 겨우 떨리고 있다

고집이 센 몸 비늘을

한 겹 한 겹 뜯어낼 때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쉰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나무숟가락으로 토닥이며

벌어지지 않는 그녀의 입을 벌려

연명할 먹이를 밀어 넣는다

나도 허기진 짐승의 족속일 뿐이라고 생각될 때

뜬금없이 고기가 씹고 싶어질 때

차라리 거울 속의 나를 꺼내고 싶다

나 같지만 나 아닌 나에게

죽어 가는 물고기를 손질해 달라 부탁하고 싶다

 

 

죽산포

 

육지로 행하던 배들은

닻을 버리고

어디로 숨어든 걸까

 

갯벌을 붉게 물들이던 나문쟁이

바위마다 붙어 있던 하얀 굴 딱지

물 빠진 죽산포 갯벌엔

작은 게들이

저마다 넓혀 가는 구멍 속

바쁜 저녁 거품을 피워 올린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버린 곳

 

갯벌에 반쯤 몸이 박혀

밀물과 썰물에

아픈 몸을 누인 채

녹슬어 가는 닻

 

가끔 환호성을 터뜨리는

낚시꾼들

 

묵묵히 시간을 버티며

천천히 늙어가는 죽산포

 

 

없는 당신

 

없는 당신은 백목련나무처럼

불쑥불쑥 발작하듯 꽃을 피워내

 

목련꽃처럼 튀어나오는 당신의 하얀 발

서늘하게 내 발등에 포개지는 밤

나는 없는 당신이 살던 집의 유리창들을

모두 깨 버리고 싶어져

 

당신이 부르던 나의 이름이

자꾸만 엇박자로 미끄러지며

후드득 발등을 관통해

 

없는 당신이 아예 없어지는 건 무섭지만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밤

 

창밖에 우두커니 매달려

나를 내려다보는 보름달 속에선

목련나무 가지 같은 당신 손가락들이

꽃잎을 밀어내고 있어

 

달 속에서 떨어지는 꽃잎들이

깨진 유리 가루처럼 반짝거리고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나는

그 먼 풍경들을 바라만 볼 뿐

 

없는 당신이

뜬소문처럼 나를 바라보며 지나가고 있어

 

   

                    * 김애리샤 시집 치마의 원주율(걷는사람 시인선 57,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