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석 시집 '이상한 나라의 샐러리'의 시(3)
♧ 몽마夢魔
죽어 가고 있었어요 알록달록한 옷에 줄무늬 양말을 신은 채 모가지가 꺾인 채 덜렁거리는 모가지가 시계추처럼 흔들거렸어요 빨간 코 얼굴은 웃고 있었죠 입꼬리가 귀밑까지 올라가 웃고 있었죠 피에로가 되어 덜렁거렸죠 피에로가 긴 입으로 말했어요 삶은 아름다워요 긴 어둠 속 조명만 비추는 공간에서 죽어가는 피에로 삶은 아름다워요 조명은 뜨개실만큼 가느다란 한 줄기뿐 조금만 벗어나도 짙은 어둠 속으로 빠질 공간 피에로는 살아가기 위해 죽어가며 웃었어요 살아가는 건 즐거운 공연 같은 거 모가지가 꺾여 죽는 순간까지 그는 웃으며 모가지를 흔들었죠 흔들고 흔들다가 갑자기 나에게 돌아보았어요 낫 같은 웃음을 흘리는 그의 눈에서 웃고 있는 나를 보았어요
♧ 기억의 도시로 떠난 시인을 생각하는 밤
-코코(2017, 리 언크리치)
사람은 죽어서 기억의 도시로 간대
산 사람들의 기억을 먹고 산대
추억 속에 살아가다 잊히면
투명해지며 사라진대
이 밤이 가기 전에 나를 기억해 줘
해가 뜨기 전에 나를 불러줘
나의 문장들을 떠올려줘
새여 바람이여 자유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나는 어디부터 사라질까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지 않겠지
족지골 중족골 비골 경골 순서대로 사라질 거예요 아래서부터 사라져가는 스릴 아오 하체가 다 사라지면 텅 빈 엉덩이에서부터 체액과 혈액이 조금씩 빠져 사라져갈 거예요 충격적인 비주얼을 뽐내며 희미해져 가는 동안 배가 터지도록 부어오른 이 거리*를 날아다닐 거예요 주렁주렁 내장들을 날리며 날아가요 아오 누구한테도 잊히지 않을 명장면 아오 기억을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추억의 도시에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몸 전부 사라져도 반짝이는 머리 하나만 남아도 돼요
서서히 투명해져 가다 마지막
활활 타오르는 불이 되었다가 사그라지면
그때 나는 한 줄의 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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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남주 시인의 시 구절을 일부 차용함.
♧ 책 속에 거미가 산다
가느다란 시집 속에 거미가 산다
가늘고 긴 다리를
얇은 종이와 종이 사이에 걸치고
거미줄을 엮어 새 집을 짓는다
책갈피처럼 종이 사이에 걸치고 선 거미는
책 속의 주인공처럼 살고 싶어
구석진 중고 세상 낭만적인 삶을 찾아온 거
그리하여 자기 몸처럼
구부정한 글자들과 어울려
기다란 문장 같은 집을 짓는다
이 낭만 거미는 하고많은 책들 중에
하필 시집을 골랐을까
시집을 집어가면 집도 무너질까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거미는 사는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 거
돈의 세상에 하등 쓸모없는
시편들만 나풀거리는 구석진 시집은
결코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숨 막히게 변해가는 바깥 세계를 떠난 채
은유의 숲이 되어 잊힐 거라는
시집들과 어울려 지은 거미집은
한편의 시집처럼 보일 거라는
♧ 밤을 걷는 도깨비
머리에 뿔난 도깨비가 공동묘지 같은 밤을 걷네 비석처럼 세워진 아파트 사이를 헤매면 석문처럼 새겨진 창문마다 붉은 불이 반짝이네 도깨비는 붉은 눈을 부라리며 방망이를 돌리며 창문마다 고개를 들이 미네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숨었나 밤마다 무서워 잠 못 이루는 어른들 사각의 공간에 갇혀 꿈을 잊은 어른들 방구석 침대 밑 장롱 속을 부라리며 뒤지네 깨어 있는 어른들의 머리를 내리쳐 꿈의 세계로 보내는데 잠든 아이들은 어른들의 꿈들을 먹고 자라네 아이들이 먹어 버린 꿈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해 붉어진 눈을 비비는 도깨비 뿔 속에 담아 둔 꿈가루를 묻혀 방망이를 두드리네 밤마다 아파트 창문들 사이를 헤매며 방망이를 두드리네 머리에 뿔난 도깨비가 깊은 잠을 꿈꾸며 고요한 밤길을 헤매네
♧ 신기루 마을
오늘도 엘리베이터를 타면
낯선 세상이 열린다
사막 너머에
바라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떠다니는 마을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거대한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밑동 근처에 한가로이 앉아
졸고 있는 할아비가 보인다
담 없는 아담한 집들이 늘어서서
마당에 널린 빨래들이 산들거린다
마을 광장엔 맑게 웃는 아이들이
개와 함께 뛰어논다
머물 집은 어디 즈음일까
단칸방 하나 부엌 하나면 족해
주위를 둘러보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친다
뒤돌아보니 위층 아저씨가
먼저 떠나기를 요청한다
기꺼이 양보하고 돌아보면
마을은 사라지고
열린 아파트 현관문이
나를 재촉한다
* 오광석 시집 『이상한 나라의 샐러리』 (걷는사람 시인선 54,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