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허영선 시집 '뿌리의 노래'의 시

김창집 2022. 2. 10. 00:03

 

유채꽃

 

그렇다면 그대

내 서럽도록 속잎 타는 봄날의 내력을

아시는지요

수왕수왕 한라산 칼끝바람 도처로

바닷물에 데이며 몸 끓는

억새밭 무덤 저기 저

비치미오름 개오름 생이오름 시근이오름 용눈이오름

팍팍 가슴팍 기어오르는

고사목 희디흰 몸통의 잠 붙일 데 없어

온 힘으로 오르내리며 시달리는

내 쪽잠의 역사를 아시는지요

밖으로는 향그런 속살 한번 터트리지 못해

한세상 속 저리며 일궈온 땅

살아서야 노랗게 빛나는 허망 볼 수밖에

가슴 속 괴인 것 여지껏 풀지 못해

지울 수 없는 무자년 봄날, 난데없는

꿈길에 밟혀도

마른 울음 재울 수밖에

그렇다면 그대여,

올 봄도 안으로 안으로 상처 덧바르며

우 일어서서 온 섬 흔들리우는

내 봄날의 시린 마음도 아시는지요 (1992)

 

*제주4.3평화공원 전시실(다랑쉬굴 발견 당시 모습 재구성)

다랑쉬동굴* 비가

 

도대체 천지의 새벽은 있었는가, 세상 문밖은

폭설 붉게 몰아치던 은월봉 돌오름 손지봉

부둥켜 끅끅 생울음 삼키던 분지로

슬픈 눈발이 흩어진다

무리져 얼크러진 한 생이 흩어진다

여린 유채꽃 대궁 하나만도 못했지, 목숨은

돌아갈 곳이란 숨겨둔 마음의 행처 하나 밖에 없어

동굴 속 한줄기 빛에 관한 관측은 어디에도 없어

난분분 분지마다 폭설은 쌓이고 쌓였지

한꺼번에 스러져 엎드린 마른 억새 황야의 이승과 저승

한치 앞 생도 예측할 수 없이 쓸려오고 쓸려가

곡기 주린 삶 앞으로 황급히 몰려왔다 몰려간

그 해, 연기의 역사

산자들의 꿈길을 재촉하지 않았겠나

버거운 연장의 삶은 부려 놓아라

뒹구는 녹슨 비녀 한 짝

어둠 속 죽어가는 풀꽃 잔뿌리는 매일 밤 죽어서도

뱉어낼 무엇이 있었을까

여린 울음마저 가둬버린 토굴 속의 잠

깊을 대로 깊어진 저 학살의 골짝마다

뼛골 사위어 가는 어둠의 나라

비로소 먼저 온 자, 문을 열었구나

아직도 들려오는 대처의 풍설은 흉흉하고 음험해

능란한 침묵은 더 능란한 자들의 세상

이제 웅숭거리는 소리마저 이슥토록

우거진 덤불가시에 찔려

어떻게 견뎌내지?

함께 썩음이 될 테까지,

우린 매일 밤 컴컴한 토굴 속 어둠의 나라

꿈길 헛길만 짚을 수밖에 (1992)

 

---

*1992년 제주 중산간 다랑쉬굴에서 43 당시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11구의 유골이 발견됨.

 

 

한라산 고사목

 

해발 1600에 다리를 뻗습니다

살아 백년 죽어 천년

한라산 구상나무숲

 

스무 살 시절에 한라산 올랐습니다

고사목 퀭한 윗세오름

눈벌에 뿌리내린 고사목 청정했습니다

나이 마흔 넘어

올라가는 한라산

아직도 살아남아 버티고 있는

고사목 만져 봅니다

비울 것 다 비우고

제 몸엣것 훌훌 줘 버린 채

기억의 뼈대 하나만 세우고도

저렇게 견딜 수 있다는 건

스스로 경계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탓일 겁니다

근본으로만 살고 싶다는 소리 없는

외침일 겁니다 (2003)

 

 

성산포 가는 길

 

마음이 지는 곳에서 길이 다하고 있습니다

거둘 것 없는 자에게도 거두리라

보이지 않는 길까지 걸어서 닿아야겠습니다

숲은 더 이상 무성하지 않고

그날 바랑 하나 진 채 허우적거리는

휑하니 가고 오지 않는 그림자 따라

빈 길까지 걸어서 닿아야겠습니다

 

마음 구르는 대로 새벽은 구르고

자귀나무는 안개로 뒤덮여 꽃 진 자리

버려진 것들은 버려져 아무데나

뒹굴고, 자귀숲 사이로 느닷없이

솟아나는 의혹의 죽음은

산자의 신경에 통증을 보태줍니다

 

붙잡을 수 없는 곳까지 걸어서

닿으려 합니다 (1992)

 

 

지금은 유채꽃 필 때

 

그런데도, 산자들은 참으로

댕댕이덩굴처럼 질긴 목숨줄이었습니다

 

그대여,

지금은 높은 산 왕성한 조릿대 숲 지나

골골마다 묻어 둔

수림의 꿈들이 그리운 집들을 찾아갈 때

바다 위로 유채꽃 피었다 질 때

남편 아들 손자 며느리 앞세우고

내 사랑 애기달래 씀바귀 봄풀로 살아날 때

그대여,

그리운 이들 먼저 앞세워

눈 먼 시간도 역사도

폭낭* 등걸 몸통으로 늙어 가는데

노랑이 분홍이 너울지는 봄날

하늘거리는 명주바다 속맘을 아시나요

아예 눈뜨기 싫어

용암같이 딱딱한

헛심장만 쥐었다 내려놓는

가슴팍 돌 소리 듣나요

견딘다고 견딘 것도 아니지만

짐승처럼 문 틈새로 기어오는 이 봄날도

그대여, 그냥 그대로의 봄날이 아닌 줄 아시나요

피뿌리풀 색깔 짙은 봄 바다로

지금 사람들 몸 풀고 마음 풀고 오고 가지만

그만 송악 덩굴 검은 슬픔 삼키는 봄날입니다 (1995)

 

---

*팽나무의 지방명

 

 

            □ 허영선 시집 뿌리의 노래(당그래 젊은 시인선 9, 200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