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김애리샤 시집 '치마의 원주율'의 시(4)

김창집 2022. 2. 15. 00:25

 

원 플러스 원

 

나는 하나가 아니기도 합니다

나는 둘일 때 진짜가 되기도 합니다

나는 나뉘는 사람입니다

 

빛나는 다이아몬드로 줄칼을 만들고

정수리에서부터 칼질을 시작하세요

당신의 하루를 나눠 보세요

 

왼쪽과 오른쪽입니다

위와 아래입니다

 

나를 사면 아기를 돌보는 노인을 드립니다

우리 모두 쓰고 남잖아요

그러니까 반품은 미덕이 아닙니다

 

약간의 수치심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야 더 세심하게 나뉠 수 있습니다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나를 팔아보겠습니다

누구, 나를 사실 분 없나요?

나를 사면 강아지와 욕실과 검은 방과 지옥을

덤으로 드립니다

 

나를 사가세요

원 플러스 원, 그리고 플러스알파

 

나는 당신의 당신입니다

 

 

앵무새 되기

 

밤도 아니고 아침도 아닌 미묘한 시각에

원근법은 사족입니다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내고 싶은 욕망으로

아직 잠들어 있는 당신의 엄지발가락을

빨아봅니다

큐비즘 시대의 그림들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빨아봅니다

꿈틀거리는 발가락 때문에 공연히 나는

앵무새를 노려봅니다

실눈을 뜨고 있던 앵무새는 고의로

혀를 굳히고요

 

백목련 꽃잎들을 이어 붙여 만든 이불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변색될진 모르지만

변색이 시작되는 그 지점은

꽤나 매력적일 겁니다

원근법이 필요 없는 미묘한 시간처럼

 

 

토르소

 

명랑한 저녁입니다

 

사람을 믿는 일이란

몸통만 남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까

입이 없는 나는 없는 귀를 의심합니다

몸통으로만 말합니다

 

차가운 쇠기둥이 내 속에

박혔습니다

아랫도리부터 심장까지

관통했습니다

시시각각 나는 당신을 믿는다고

믿었습니다

자상한 쇼윈도 같은 당신은 나를

투명하게 진열했습니다

 

나는 사지 잘린 개가 되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몸통만 남은 채

투명해졌습니다

내가 지워지는 사이 당신은

안녕하셨나요

있지도 않은 충직한 나의 꼬리는

웃음을 흘려댑니다

 

당신이 내 뒤에서

내 머리통을 들고

조용히 따라오는 저녁입니다 나는,

없는 머리통을 흔들어 대며

더 할 수 없이

명랑한 저녁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나는 사지 잘린 개가 되었습니다

 

 

자화상

 

고장 난 바퀴 위에 올라타 덜덜거리는 표정으로 굴러다니지

세상 모든 일이 합법화된다면 우선 모르핀을 사 모을 거야

사지에 바늘 자국으로 전갈 문양을 새길 거야

사막 같은 구름 속을 무게도 없이 기어 다닌다면

그 길의 끝은 어디에 닿게 될까

발가락들을 갉아먹는 모래 구덩이의 식욕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모르핀을 찔러 넣듯 모래들을 먹어치우면 그만이니까

쓸모없이 선한 낙타의 눈알들이 멀리 도망가도록 질겅질겅 씹어서

지평선 끝까지 뱉어버리면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아

거대한 시계처럼 보름달이 떠오를 때

그 뒤편으로 숨어들어 마음껏 오르가슴을 느껴야지

초침은 착실해서 박자를 놓치는 법이 없잖아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그 어딘가에 고장 난 바퀴를 묻어버리고 싶어

화산재는 모든 길 덮어 버리는 게 매력이니까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말에 덮인 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발음해 본 적 없는 쾌활한 미아, 그러나

세상은 늘 쾌활한 것만은 아니어서

타인들 속에 섞여 들어 또 다른 타인이 되어 버리는 나는

모래를 씹어 먹는 사람

새벽마다 모르핀 같은 술을 마시며 신에게 다가간다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

나에겐 표리부동 같은 아멘

 

 

자위自慰

 

이제 완전한 사막이 될 준비가 되었네

낙타의 등이 바스러지며 흘러내리네

그동안 나는 쓸모없는 오브제들을 생산하느라

혀 위에서 선인장들의 가시를 핥으며 비린내만 풍겨왔네

그걸로 충분해 이젠 하늘을 애무하고 싶어

지워질 때까지, 그러나

하늘은 그저 거대한 이불일 뿐

나와는 별다른 관계를 갖지 못하네

몇몇 순간은 교정부호 같은 소나기들을 쏟아내기도 하지만

내 몸에 난 모든 구멍들의 팩트는 사막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메마른 둔덕

난 오아시스가 되기 위해 엎드려야 할까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아야 할까

이쪽에서 허물어지면 저쪽에서 다시 세워지는 사막을 위해

적절한 시간에 지평선으로 사라져야 할까

그러니까

눈꺼풀을 잘 덮고 모래바람을 즐겨야지

사막이 붉어지는 시간

노을이 사막을 집어삼키는 건 형벌이 아니라서

붉은 사막 속으로 내가 기어들어가는 것도 죄가 아니라서

난 다시 서걱서걱 눈알을 굴리며 걸어가네

자신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낙타처럼

하늘과 사막 사이에서

조금은 의미 있는 문장부호가 되고 싶은 것이네

 

 

            * 김애리샤 시집 치마의 원주율(걷는사람 시인선 57,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