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의 시(3)

김창집 2022. 2. 17. 00:23

 

달팽이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달은 차돌같이 차다

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 있다

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 이슬을 밟으며

내가 가야 할 길 앞에서 누가 오고 있다

 

죄 없는 소년이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아마 아침 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나비

 

누구의 상장(喪章)인가

 

누구의 상여가 길 떠나는가

 

나비 한마리가 태백산맥을 넘는다

 

속초 앞바다

 

삼각파도 끝에 앉은 나비

 

 

나뭇잎을 닦다 - 정호승

 

저 소나기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얹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푸른 하늘이 되는 일이다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사람이 죽는다면

사람은 그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사막

 

들녘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듬뿍 머금고

들녘엔 들꽃이 찬란하다

사막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흠뻑 빨아들이고

사막은 여전히 사막으로 남아 있다

받아들일 줄은 알고

나눌 줄은 모르는 자가

언제나 더 메말라 있는

초여름

인간의 사막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잠이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하여

잠이 들었다가도 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기 위하여

그 별똥별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하여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가끔은 외로운 낮달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인간을 위해 우시는 하느님의 눈물도 받아둔다

누구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번 들여다보라

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간밤에 흘리신 하느님 눈물이

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있다

 

 

자살에 대하여

 

창밖에 펄펄 흩날리던 눈송이가

창문 안으로 슬쩍 들어와

아무도 모르게 녹아버린다

누구의 죽음이든 죽음은 그런 것이다

굳이 나의 함박눈을 위해 장례식을 할 필요는 없다

눈발이 그치고 다시 창가에 햇살이 비치면

그때 잠시 어머니를 생각하면 된다

나도 한때 정의보다는 어머니를 사랑했으므로

나도 한때 눈물을 깨끗이 지키기 위해

눈물을 흘렸으므로

나의 죽음을 위해 굳이 벗들을 불러 모을 필요는 없다

나의 죽음이 너에게 위안이 된다면

너 이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나의 죽음이 너에게 기쁨이 된다면

눈이 오는 날

너의 창가에 잠시 앉았다 간다

 

 

                 *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199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