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허영선 시집 '뿌리의 노래'의 시(3)

김창집 2022. 2. 23. 00:02

 

팽나무

 

젊은 그대

아무래도 나는 이 길을 가야겠다

내 몸은 이미 너무 늙어버렸으나

나의 시간은 매일 젊다

부드럽고도 강한 근육으로 수백 년을 살아왔다

소금바람만 먹고도

한 생을 살아왔다

내 몸의 발원지는 바람이거니

내 삶의 배경은 바람 부는 섬이거니

그렇게 길 건너던 새마저 심한 상처입고

그렇게 내 성한 몸에 상처를 주었지만

차마 이 땅을 떠나지 못하겠다

울퉁불퉁 거친 소금기에 절여지고

폭풍이 끈덕지게 이승의 삶 휘젓고

내 연한 솜털까지 노려보았어도

닳고 닳아질수록 보드랍고 매끄러운 내 피부는

늘 팽팽한 긴장이다

 

젊은 그대

아무래도 나는 떠나지 못하겠다, 이 섬을

내 여린 귓가엔

화산의 불기둥 삽시간에 그어지던 날

온 몸의 수액이란 수액 타들어가 숨소리도 멈춘

하늘 새 비명까지 삼켜버린 그 날

굽이치던 물결이 절벽을 향해

절벽이 물결 향해 통곡하던 소리 들린다

아직도 그 날의 까마귀

목메어 우는 소리 들린다

 

바람 든 관절 삐걱거려도

나는 기다릴 줄 안다, 기어이

강하고 오래된 근력으로

돌의 뼈에 견디고 태풍의 육질에 참는 근력으로 (2003)

 

 

석공을 위하여

 

생의 대부분은 돌의 기억이다

돌을 깬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돌을 붙인다

돌담은 맨 아래 굽돌이 생명이다

그것이 비틀려 봐라

영락없이 윗담은 틀어지는 법

줄을 맞춰 담을 놓는다

 

큰 돌 아래는 납작하고 작은 돌

큰 것 틈새에 작은 돌 맞춘다

다 쌓았다면 봐라

줄맞춘 제주 돌담을 한번 흔들어봐라

출렁 출렁 파도처럼 구비치나니

오름의 능선처럼 너울지나니

파도는 두 발과 세 발 사이에 흔들려야

합격점이다

기억해라

중간이 흔들려도 안 된다

휘청대면 다시 쌓아라

10미터 흔들림이

유연한 고무줄처럼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다

 

비바람 아무리 발악해봐라

돌의 살을 뚫고 뼛속 바람만 채울 뿐

견딜 수 없을 만큼 휘어져도

절대 찢겨지는 법 없다

용암의 강에서 견뎌낸

저 돌과 돌의 뼈를 타넘다

찢겨지는 것은 네가 몰고 온 바람의 살 뿐이다 (2002)

 

 

뿌리의 노래

 

깊디깊은 바윗돌 잘도 견뎌왔구나

갯메꽃, 뫼메꽃 살가운 것들 껴안고

잘도 견뎌왔구나

억세게 땅을 움켜쥔 채 늙은 뿌리는

늙은 노래를 부르며 삶을 견뎌왔으니

우린 놀랍게도 무르고 헐은 상처도 싸매며

메꽃, 달개비꽃 보드라움을 노래해 왔구나

질펀한 여름날의 해무

길 잃은 자들 위로 짙게 깔려

버둥거리며 우린 길을 찾아왔으니

막 버스가 이미 지나가도 두렵지 않았던 건

삶은 이미 견딤의 시작에서

견딤의 정점으로 향한다는 의지 아니었던가

 

자갈은 자갈대로 한밤중 자갈 자갈

섬 속에서 떠다니는 섬은 부웅부웅 소리 내며

해무가 지우는 길을 빛나게 닦는구나

들어봐라, 제주 섬 한밤을 빙빙 돌며

떠나지 못하는 뿌리의 울음

견딘 만큼 더 견디라 하지 않느냐 (1997)

 

 

협죽도

 

제발 나를 놔줘요

강한 구두 뒤축으로 나를 밟지 말아줘요

날이 선 새벽 어지러이

퍼런 살기 번득이며

가슴 탕탕 울리는 땅 끝 소리 들려요

이제 숨죽여 엎드리지 않기

훌쩍훌쩍 무더기로 참는 울음 없기

바람벽에 시달린 죽지가 아릿아릿 무너져요 (1992)

 

 

흔들림에 대하여

 

간혹 사람들은

사람들 마음의 뜰이 얼마나

비좁은 잡풀로 채워진 것임을

쉽사리 눈치 챌 수 없다

부서지고, 흐트러지면서

바람이 뜰 한쪽을 왕왕 흔들어대는 것은

흔드는 만큼 그 속을 비워내고 있는 것인지를 모른다

 

가령,

나를 달아났다고, 꽁꽁 머리칼을

숨겼다고 해서, 마음아

너는 안 보이는 것 같으냐

사월에도 은성한

순정처럼 쓰러지는 유채꽃 벌판,

부당하게 떠나왔다 떠나가는 한 역사가 스러진다

바람 길로 흔들리며 이우는 유채꽃 호수

호수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흔들리지 않으면서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무릇 일렁이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빛에도, 바람에도, 그리움에도

모든 흔들리지 않는 것들은

흔들리지 않아서 더욱 흔들린다

 

바람으로 채워진 짚단더미 너머

눌리운 우리들 시대의 사랑

치골을 웅숭그리며 확실한 뿌리

더 깊게 더 넓게 내리라 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남은 일은

흔들리고 흔들릴 일 (1996)

 

 

돌아서 오는 길

 

어느 새 저 위세 등등한 호박넌출 마음마저 앗아가

갯질경 찰싹 달라붙은 가슴으로 돌아오는 길

차마 당신 마음의 넌출 하나 당기지 못해

초췌한 바랑 하나 짊어진 수행자처럼

가파른 심장의 협곡만 타 넘었습니다

오리나무 싸리나무 상수리나무 후박나무 아카시나무

 

알던 꽃도 눈 밖으로 나가 화끈 거리던

그날 새벽

우수수 당신 눈동자로 우거지던 바람까마귀 떼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무덕지더니

엉겅퀴 살코지에 비수처럼 찔린 탈골한 사랑의 등골 하나

궂은 날 삭신 으깨듯 허리께의 통증으로 달려들었습니다 (1992)

 

 

                                     *허영선 시집 뿌리의 노래(당그래, 200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