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숙 시집 '장미 연못'의 시조

♧ 겨울, 애월에 서다
풍랑에 떠밀리는, 아니면 또 돌아오는
저것은 제주 수선 한파 속의 금잔옥대
바람이 전하는 잔을 두 손으로 받는다
끊임없이 다라가던 중국의 시안성처럼
파도가 축조했나 이 끝없는 단애는
여기서 집을 부린다 기껏 애월에 걸린 달
달은 파도칠 때 벼랑으로 떠밀린다
애월에선 누구도 정착하지 못하는지
허공의 가마우지가 일획 울음 참고 간다

♧ 겨울 숲에 들다
한라 등성이 시오름 숲 제 안을 비워 놓았다
나뭇가지 햇살 받아든 훈훈한 온기에
두텁게 감싼 겉옷 하나 슬며시 벗어든다
코끝을 스치는 맵싸한 향기 뉘신지
빛바랜 추억 모두 단풍물 드는 여기
생각도 물웅덩이일까, 또 낙엽이 떨어진다
아득한 숲길, 돌아서면 저리도 환한 허공
벼린 잎처럼 아리던 그 이름도 부질없어
단풍 든 물웅덩이에 내려 함께 스민다

♧ 강화, 덕진진에서
저 거친 물살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던
속살 붉게 드러낸 갯벌의 숨결 따라
내 안의 상처를 닮은 격전지를 오른다
쌓아 올린 성벽 틈새 깃발의 함성 들리듯
왕조의 그 흔적도, 딱지로 앉은 상처도
나들길 섬을 휘돌아, 바람에 흩어졌다
덕진진 바다를 향한 철갑의 총포에서
외진 골목 앉은뱅이로 피고 지는 저 풀꽃들
또 한 번 전승을 알리는, 이름 모를 병사 같다

♧ 바람의 날
선녀가 내려왔다는 오름이어서일까
눈 내려 주위가 온통 빛으로 환할 때
억새는 싸리비 되어
바람을 쓸고 있다
나는 한때 너에게 모든 것을 맡겼지
제주바다 굽어보는 오름 올라 글썽이면
쉼 없이 불씨 살리려 몸을 낮춘 바람이여
산록도로의 저 길들을 마음에서 지우고
허공에 무수한 길들을 내어 놓으며
괜찮다 그저 괜찮다,
바람은 저를 버린다

♧ 연어 이야기
벚나무 단풍 들 듯 산란기의 연어들
뜯겨지고 채여도 어머니 품 안기고파
몇 천 리 달빛을 따라
빠르게 유영한다
북태평양을 지나 남대천으로 회귀는
살갗이 벌겋게 터지는 찬란한 용기
어머니 자궁 속으로 들어가 숨 끊는다
너에게 가는 길도 맹목의 질주라 했지
저 바다 물결 따라 흘러간 내 안의 섬
난류를 거슬러 올라
오직 너를 향한다

♧ 가파도
모슬포항 비릿함에 젖어야 이르는 곳
그리움도 질긴 인연도 여간해선 못 들이는
지금껏 쌓던 탑마저 슬며시 놓아야 하네
포제단 순비기꽃이 자맥질하는 시각엔
누군가 대신해서 치렀을 제의인 듯
사방에 별빛이 내려 눈을 뜰 수 없었네
끝내 쫓아와 놓아주지 않던 바닷새 울음
바다식당 여주인 낭창낭창 밥 주문하라는
그 어떤, 언약보다도 나를 깨우는 시장기
*김윤숙 시집 『장미 연못』 (책만드는집, 2011)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