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김윤숙 시집 '장미 연못'의 시조

김창집 2022. 3. 4. 00:18

 

겨울, 애월에 서다

 

풍랑에 떠밀리는, 아니면 또 돌아오는

저것은 제주 수선 한파 속의 금잔옥대

바람이 전하는 잔을 두 손으로 받는다

 

끊임없이 다라가던 중국의 시안성처럼

파도가 축조했나 이 끝없는 단애는

여기서 집을 부린다 기껏 애월에 걸린 달

 

달은 파도칠 때 벼랑으로 떠밀린다

애월에선 누구도 정착하지 못하는지

허공의 가마우지가 일획 울음 참고 간다

 

 

 

겨울 숲에 들다

 

한라 등성이 시오름 숲 제 안을 비워 놓았다

나뭇가지 햇살 받아든 훈훈한 온기에

두텁게 감싼 겉옷 하나 슬며시 벗어든다

 

코끝을 스치는 맵싸한 향기 뉘신지

빛바랜 추억 모두 단풍물 드는 여기

생각도 물웅덩이일까, 또 낙엽이 떨어진다

 

아득한 숲길, 돌아서면 저리도 환한 허공

벼린 잎처럼 아리던 그 이름도 부질없어

단풍 든 물웅덩이에 내려 함께 스민다

 

 

 

강화, 덕진진에서

 

저 거친 물살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던

속살 붉게 드러낸 갯벌의 숨결 따라

내 안의 상처를 닮은 격전지를 오른다

 

쌓아 올린 성벽 틈새 깃발의 함성 들리듯

왕조의 그 흔적도, 딱지로 앉은 상처도

나들길 섬을 휘돌아, 바람에 흩어졌다

 

덕진진 바다를 향한 철갑의 총포에서

외진 골목 앉은뱅이로 피고 지는 저 풀꽃들

또 한 번 전승을 알리는, 이름 모를 병사 같다

 

 

 

바람의 날

 

선녀가 내려왔다는 오름이어서일까

눈 내려 주위가 온통 빛으로 환할 때

억새는 싸리비 되어

바람을 쓸고 있다

 

나는 한때 너에게 모든 것을 맡겼지

제주바다 굽어보는 오름 올라 글썽이면

쉼 없이 불씨 살리려 몸을 낮춘 바람이여

 

산록도로의 저 길들을 마음에서 지우고

허공에 무수한 길들을 내어 놓으며

괜찮다 그저 괜찮다,

바람은 저를 버린다

 

 

 

연어 이야기

 

벚나무 단풍 들 듯 산란기의 연어들

뜯겨지고 채여도 어머니 품 안기고파

몇 천 리 달빛을 따라

빠르게 유영한다

 

북태평양을 지나 남대천으로 회귀는

살갗이 벌겋게 터지는 찬란한 용기

어머니 자궁 속으로 들어가 숨 끊는다

 

너에게 가는 길도 맹목의 질주라 했지

저 바다 물결 따라 흘러간 내 안의 섬

난류를 거슬러 올라

오직 너를 향한다

 

 

 

가파도

 

모슬포항 비릿함에 젖어야 이르는 곳

그리움도 질긴 인연도 여간해선 못 들이는

지금껏 쌓던 탑마저 슬며시 놓아야 하네

 

포제단 순비기꽃이 자맥질하는 시각엔

누군가 대신해서 치렀을 제의인 듯

사방에 별빛이 내려 눈을 뜰 수 없었네

 

끝내 쫓아와 놓아주지 않던 바닷새 울음

바다식당 여주인 낭창낭창 밥 주문하라는

그 어떤, 언약보다도 나를 깨우는 시장기

 

 

                                     *김윤숙 시집 장미 연못(책만드는집, 201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