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김수열 시인의 '사모곡(思母曲)' 모음

김창집 2022. 3. 8. 00:02

 

37일 월요일 아침

김수열 시인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부음(訃音)을 들었다.

38일이 일포일이고

39일에 발인한다고 했다.

 

누군들 어머님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없으랴마는

김수열 시인의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자간의 마음 씀이 유다르다.

 

이미 알려진 역작들이지만

이곳에 찾아 옮기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어머니 이야기

 

  나는 내 언어를 교과서에서 배웠다. 모르는 언어가 눈에 띄면 표준이 되는 언어만 실려 있는 국어사전에 기댔다. 그러나 어머니는 당신의 언어를 삶에서 체득했다. 바닷물에 절고 바람에 씻겨 오로지 알갱이만 남은 언어로 어머니는 울고 웃고 사랑하고 또 싸웠다. 한때 나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고 미웠다. 부끄러웠다. 문학에 뜻을 두고 제주의 속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어머니의 언어가 귀에 들어왔다.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 언어의 소중함을 알았다. 더불어 내가 배운 언어에는 감정도 느낌도 진정한 분노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언어로는 어머니가 온몸으로 살아온 삶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새벽별을 보며 밭에 나갔다가 허리 한번 펼 틈도 없이 다시 바당밭으로 나가야 하는 고단한 삶을, 교과서에서 배운 언어로는, 더군다나 표준만을 강요하는 국어사전에 실린 언어로는 도무지 그 깊이와 너비를 헤아릴 수도 담아낼 수도 없었다. 삶을 낳고 기르다가 결국은 빼앗기고 능욕당하고 스러져간 술픔은 물론이거니와 콩 반쪽도 나누는 넉넉한 삶의 소용돌이를 당차게 되갈라치는 당당함을 어머니의 언어가 아니면 담아낼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언어는 늘 피해자의 언어였다. 피해자의 언어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한숨과 눈물이 섞여 있다.

 

  '양지공원에도 못 가보고 집이서 귀양풀이 헌 덴 허영게 그딘 가봐사 헐 거 아닌가? 기여게 맞다게 얼굴보민 속만 상허고 고를 말도 없고 심방어른이 가시어멍 거느리걸랑 잊어불지 말았당 인정으로 오천 원만 걸어도라 미우나 고우나 단사윈디 저싱질 노잣돈이라도 보태사주 경허고 영개 울리걸랑 촘젠 말앙 막 울어불렌 허라 속 시원이 울렌허라 쉐 울듯 울어사 시원해진다 민호어멍 정신 섞어졍 제대로 울지도 못 해실거여 막 울렌허라 울어부러사 애산 가슴 풀린다 울어부러사 살아진다 사는 게 우는 거난 그자 막 울렌허라 알아시냐?' (어머니의 전화, ‘섬에서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일중에서)

 

 

 

오리

 

  하얗고 비리비리한 어린 아들이 안쓰러운 어머니는 서문다리 아래서 물놀이하는 생오리 한 마리 사다 다리 묶어 처마에 매달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대가리쪽으로 피가 쏠려 파닥이는 그걸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신돌에 갈아 날이 선 부엌칼로 탁, 목을 치자 꽥, 떨어져 나가면서 한 줄기 붉은 것이 사기그릇에 쫙, 쏟아졌다

 

  굳지 말라고 어머니는 그것에 활명수 섞어 새끼손가락으로 휘휘 저었고 아들은 코 막고 눈감아 꼴깍꼴깍 단숨에 받아 마셨고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붉은 입술에 동고리사탕 하나 쏙, 밀어 넣었다 (호모 마스크스, 2020)

 

 

 

개역

 

  탈곡 마치고 수매 끝나면 말가웃 보리 볶아 등짐 지고 방엣공장 갑니다 볶은 보리에 당원 넣고 기계는 돌고 돌아 탈탈탈탈 뽀얀 개역이 나옵니다 보리 한 되로 기계 돌린 값 대신하고 머릿수건 풀어 탁탁 먼지 털고 집으로 옵니다 개역 너댓 술 넣은 양푼 보리밥 가운데 놓고 삼방에 둘러앉아 달그락달그락 개역밥 먹습니다

 

  개역물 만들어 4홉들이 병에 담아 먼 바당에 갑니다 물질은 밥심인데 밥차롱 대신 개역물 병에 담아 먼 물질 갑니다 물숨이 찰 때까지 저승바닥 훑고 숨의 끝자락에 이승으로 올라 긴 숨 몰아쉽니다

 

  나 살았수다, 호오이-

  나 이디 있수다, 호오이-

 

  잠시 테왁에 몸 얹혀 개역물로 주린 배 채웁니다 귀눈이 왁왁허고 한라산이 어질어질하여도 이승에 남은 것들 살리기 위해 병굽이 보일 때까지 저승으로 내려갑니다

 

  머리에 피가 쏠립니다 (호모 마스크스, 2020)

 

 

 

긴한 말씀

 

긴히 할 말이 있으니

퇴근길에 꼭 들르라는 어머니

대체 무슨 일이냐고 되물으니

전화로는 말할 수 없다 하신다

 

위암이 재발해신가 아니면

아버지가 불편하신가

 

우풍 심한 어머니집에 들르니

우선 밥부터 먹으라며

안과 갔다가 꼬닥꼬닥 동문 시장에 갔는데

꿩마농이 하도 싱싱해 한 단 사고

멜젓 조금 넣어 조물조물 파김치 담고

눈 맞은 배추 넣어 만든 콩국으로

저녁을 먹는데, 옆자리에 토다앉아 긴한 말씀 하신다

 

언치냑에 테레비 보난

ᄀᆞ는 거나 살진 거나

매 혼 가지렌 ᄒᆞ여라

봉다리 사탕 사다둠서

기리울 때마다 ᄒᆞ나썩 ᄈᆞᆯ아먹으민

끊어지덴 ᄒᆞ여라

작산 것이 그거 ᄒᆞ나 못ᄒᆞ여?

ᄆᆞ지직ᄒᆞ게 끊어불라

 

알았수다 나오지 맙서

파김치 봉지 들고 달랑달랑

대문 밖 나서자마자 뒤 한 번 돌아보고는

담배 입에 물고 긴한 말씀 되새긴다 (빙의, 2015)

 

 

 

자리물회

 

  여든 넘은 어머니가 쉰 넘은 아들 위해 해마다 자리철이면 자리물회 만드신다 말이 운동이지 바람 불면 휘청이는 몸으로 허청허청 동문시장에 가서, 보고 또 보고 고르고 또 골라 알 밴 자리 한 양푼 미나리 한 줌 양파 두 개 오이 두 개 깻잎 열 장 새우리 ᄒᆞᆫ 줌……

 

  어느젠가 자리물회 맨들아시매 왕 시원히 ᄒᆞᆫ 사발 ᄒᆞ라ᄒᆞ는 말에 안 가는 것도 그렇고 해서 가서 먹는데, “식당엣 것보다 맛 좋수다빈말로 한 마디 했는데 그 때부터 어머니는 해마다 자리철이면 시장에 가서 자리 사다 조선된장에 빙초산 넣고 조물조물 버무려 물회를 만드신다

 

  앞으로 몇 년 더 만들지 모르지만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올해처럼 만들고 또 만들어 자리물회 맨들아시매 왕 시원히 ᄒᆞᆫ 사발 ᄒᆞ라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듣고 또 들었으면 하는 지나친 욕심을 부려보는 것이다 (빙의, 2015)

 

 

 

마지막 소망

 

  이녁 발걸음으로 화장실 출입허당 오고생이 죽어지는 게 말년 늦복이렌 허영게 아이고 게메 느네 아방은 이미 글러부러신게 경해도 귀는 트연 뭐셴 고르문 고개도 끄덕허고 물 도렌도 허고 그것만도 어디라 더 아프지만 말앙 자는 듯이 죽어지믄 그것도 복이주 하루라도 나보다 먼저 죽어주는 것만도 큰 복이고말고

 

  게나저나 나 죽을 때랑 나냥으로 화장실 출입허당 톡허게 죽어져사 헐 건디 경해사 느네덜이 덜 고생헐 건디 게메 경 해지카 (빙의, 2015)

 

 

                                    * 사진 : 흰색 봄꽃들(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