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이강하 시집 '붉은 첼로'의 시(3)

김창집 2022. 3. 14. 00:40

 

저물녘

 

  저물녘의 신비는 사소한 것으로부터 발산한다

  아주 겸허하면서 적막히

 

  소녀들이 살포시 눈을 뜨듯 빛을 꺼내는 친환경가로등에서, ‘잘근신록을 씹는 수천 개구리 우는 소리에서, 한 번도 엇갈림 없이 생의 계단을 나란히 올랐을 것 같은 다정한 두 부부 뒷모습에서, 황소들이 먼 산 위 노을과 이별하는 부름에서, 초승달을 채워가는 강아지 속도에서, 사랑스러워 내 품는 소년의 분홍 입김에서, 떨어진 나뭇가지에 주춤거리다 치달리는 자전거바퀴에서, 방울꽃이 새 날개 속에서 끝없이 흔들린 것에서, 한생 한생이 출몰하는 매 순간은

 

  떠난 사람이 누군가가 그리워 부는 트럼펫 소리

  어둠의 공명은 무한한가

  나는 이미 무아경이다, 걷는 내내

  열도列島의 심연으로부터

 

 

 

결빙구간

 

지퍼를 열고 있었다

탈골된 발목

몹쓸 예감이 맞았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고목나무 밑 까만 음지 같은 날들

 

물고기야, 어디 있니?

이파리 뒤에 숨었니, 옹이 속에 숨었니

대답해주지 않으면

아무 곳에나 작살을 놓을 거야

 

문 닫힌 회사 앞 가족들이

찢어져 너덜거리는 포스트잇처럼 떨고

눈발은 겹겹 능선 표지판에 침묵을 건네고

산과 산은 어깨를 기대고 꽁꽁 언 마음을

어디로 흘려보내는 걸까

 

촉감으로 뭉쳐진 음지의 끝 이전의 자궁에서

눈물 같은 시간을 만난다 따뜻한

햇살이 발목 사이로 모여든다 늑골 사이

구멍이 뚫리는 소리 얼음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것이다

새의 울음 따라 벼랑에 서 있다

 

 

 

안개

 

나는 푸른 갈퀴를 단 음유시인

간절히 말하는 것도

용암처럼 꿈틀거리는 불만도

참고 이겨내는

한 무더기

예술적 은유다

 

입이 긴 한 주가

꼬리가 잘린 한 주가

뱀의 형상으로 다가와 고민의 해결을 요구하면

너는 너일 뿐

나는 나일 뿐

예수 형상이었다가

부처 형상이었다가

 

푹푹 어둠과 새벽을 떠먹고

급기야 분명한 안개 속 언어들

우주의 기운으로 변하는 틈과 틈 사이에서

스스로 팽창함을 즐기다니,

서로 의견과 상관없이

한줄기 존재의 영원을 꿈꾸는

꽃잎들 절규로 환생한다

 

 

 

선운사 도솔천

 

이곳에 정박한 나는 다시 가을이다

흐르는 물소리 따라

일곱 날이 빵빵한 도솔천

송악의 신비에 나는 자꾸 뒤돌아본다

서로가 만나지 못해도

속세를 떠난 지금이

너무 평화롭다고

권세의 뒷골목에 치여 아픈 지인들에게

일곱 날의 슬픔은 다 내려놓으라고

나 떠난 뒤, 어느 날 홀연히 여기에서

일곱 날을 머물러도 괜찮다고

얼마나 멋진 목소리인지

멋진 뒷모습인지 묻지 않는다고

입술 꾹 깨물고

뒤돌아서 나를 모른 채 걸어도

성실한 믿음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너를 알아가는 하룻밤이

나를 알아가는 하룻밤이라고

한없이 투명한 빛의 나라

여기에 일곱 날을 띄워 보지 않겠냐고

천년의 눈길, 꽃무릇은

지금 나를 견디는 중이라고.

 

 

 

사막과 꽃잎

 

당신 내부는 버석거리는 사막

어쩌다 별 무리를 붙잡고 온몸 일으켰으나

걸음은 매순간 엿가락처럼 휘어져

꽃잎 우네

 

산을 사랑했으나 지금은 방 한 칸이 전부

큰 산을 보려고 해도 당신 뼈 속엔 건조한 바람만 가득

미친 듯이 자해를 꿈꾸는 늪처럼

신이 내린 임무치고는 너무 가혹해

꽃잎 우네

 

계절 따라 맛있는 음식. 자식효도에 행복할 거라고

큰소리치던 도시의 똑똑한 아들은 어디로 갔나

마당이 없으면 어때요? 아파트에서 아리랑도 부르며

함께 살자던 딸은 또 어디로? 처신을 잘못하면

방 한 칸 자유도 날아간다 하시며 오로지 한 집만 고집한

그런 당신을 이해 못한 혈맥들

꽃잎 우네

 

큰 집이 큰 도시가 두려워

능력의 한계를 알고 있으므로 내 밖 문화를 멀리 한다네

지금은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뿐

어머니- 우리 어머니

꽃잎 우네

 

 

 

나는 거문고, 당신은 기타

 

나는 아직 홍콩인데

당신은 나보다 한 발 앞선 싱가포르,

서둘러 당신에게로 날아가는 비행기 밖

비가 내리네

 

나는 나를 모르고 내 시선이 자꾸 느린데

당신은 이미 센토사 섬을 향한 새

어쩌자고 길이 자꾸 어긋나는지

비가 내리네

 

나는 고작 보타닉 가든이 관심인데

당신은 벌써 바탐을 돌아 나온 배,

미리 예측하지 못한 서로의 발자국 소리

비가 내리네

 

서로의 쟁점은 스침인데

닿는 곳이 너무 고요하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하니

어긋난 언행은 숨바꼭질을 좋아하지

고도로 단련된 빛과 어둠의 꼬리 속

비가 내리네

 

어디서 만나든 소통한 시점이 타협일 것이네

비가 점점 거세지네

 

 

                * 이강하 시집 붉은 첼로(시와 세계, 201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