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천 시집 '구석'의 시들(2)
♧ 집
집, 얼룩무늬의 털스웨터 한 벌로 평생을 나는 표범을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지켜보면서, 그들의 집이 어쩌면 저 한 벌의 털스웨터일 수도 있겠구나 싶은 부러움에 빠져 본 적이 있다.
집, 아니 짐이여, 무거움이여.
집, 그러나 나는 내 말년의 모습이 조금쯤은 말라 보였으면 하는 마음이 적지 않다. 별로 그럴 일은 없을 듯하지만, 볼따구니의 살집이 한 점의 긴장도 없이 추욱 늘어지거나, 욕심의 뱃구레가 오크통처럼 불거져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았으면 싶다.
집, 표범이 아니라도, 실은 내 몸도 한 채 집이었구나.
♧ 한라산에서
처음 오르는 길에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두 번째 오르는 길에도 말 한마디 걸어주지 않았다
세 번째 오르는 길에서야 바람 한 줄기 얻어맞았다
네 번째 오르는 길에 다리 한쪽 접질러주었다
마른자리에서나, 방 안에서나, 수음 버릇처럼 시 쓰다 온 작자, 네 글은 너무 작다고, 하다못해 저기 깨어진 기왓장, 돌멩이 하나에도 어려 있을, 역사 될 노래 쥐뿔도 멀었다고, 크고도 희게 벗은 몸으로, 한 나라의 가장 마지막까지의 山陰(산음) 하나여, 높고도 고요하다.
♧ 雨氣(우기) 아래
공친 김生(생)이 슬레이트 지붕 쪽창 밑으서, 닷새 남짓 걸친 빤쓰 골마리에 손두덩 한 짝을 순하게도 묻고, 쩌어기, 영광 원자력발전소 수챗구녁 어름 빈 바다같이, 새우는 읎고 새우 그림만 그려져 있는, 새우깡 봉다리 닮은 꾸겨진 낮잠에 빠졌다. 김생에겐, 밀린 것이 빨래뿐이 아니다. 봄 꽃잎이라면 늦피었겠고, 夏節(하절) 것이라면 서둘러 벙글었을, 흰 꽃잎 몇 잎도, 마당귀 어쩐지 불어터진 밥풀테기 모냥인데, 밀린 것들에게 좀 셨다가 가라믄서,
작년, 재작년 밀린 빗줄기만 허천나서.
♧ 모자를 하나쯤
나와 함께 견디고 왔을 가난한 시간 위에도
하나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잘 변하지 않던 습관에게도
하나쯤
햇볕에 그을려 자꾸만 늙어가는 목덜미에도 하나쯤
내 쓸쓸한 눈매라거나 이마 위에도 하나쯤
외양에는 별다르게 신경을 써본 일이 없던 나로서는
좀 엉뚱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지금과 같은
심경의 변화 위에도 하나쯤
예전과 같이 억지로 밀어붙이거나 힘으로는 말고
제법 이처럼 공손해진 손길과 마음으로
되도록이면 사뿐하면서도 폼이 나도록 하나쯤
정말로 주머니가 좀 헐렁해져도 좋으니
제대로 된 모자점에서 하나쯤
거울을 보기 위하여, 머리 한쪽을 벅벅 긁어 보이며
멋쩍은 표정으로 그 앞에 서보기도 하는
거기 비쳐 있는 너를 향해서도 하나쯤
굴렁쇠처럼 멀어져가는 세월의 뒷그림자에게도
손이라도 흔들어주는 마음같이
하나쯤.
♧ 젖을 향하여
열두 개쯤 되어 보이는
마음껏 불어난 탱탱한 젖통을
땅바닥 가깝게 늘어뜨리고
집을 향해 돌아가는
어미 개 한 마리를 본다
이때쯤이면 한낮의 햇빛들도
젖을 향하여, 일제히 제 빛을 모은다
나도 모르게 젖을 향하여
차렷, 거수경례를 하고 싶어진다.
♧ 안쪽을 위하여
소싯적에 신발 바깥쪽에 신경을 쓰곤 했던 것인데
요즘 들어서, 발가락에 자주 땀이 차는 걸 느끼면서
어쩌다 그렇게 신발의 안쪽을 들여다보게도 되었다
큽큽한 발 냄새가 먼저 와서 들키는가 싶더니
끌고 온 길들의 요철, 지난 시간의 버짐 같은 기억들이
껌처럼 들러붙어 있는 것을 마주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신발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
한때는 그렇게 바깥쪽을 향하여
온전히 빛이 나기를 바랐던 열망의 반대쪽에 자리한
순식간에 코를 싸쥐게도 하는 그것이
신발을 더더욱 신발답게 하는 안쪽의 일이었음을
유심한 마음으로 느껴보기도 한다.
* 정윤천 시집 『구석』 (실천문학사, 2007)에서
* 사진 : 얼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