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정윤천 시집 '구석'의 시들(2)

김창집 2022. 3. 21. 01:15

 

 

  집, 얼룩무늬의 털스웨터 한 벌로 평생을 나는 표범을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지켜보면서, 그들의 집이 어쩌면 저 한 벌의 털스웨터일 수도 있겠구나 싶은 부러움에 빠져 본 적이 있다.

 

  집, 아니 짐이여, 무거움이여.

 

  집, 그러나 나는 내 말년의 모습이 조금쯤은 말라 보였으면 하는 마음이 적지 않다. 별로 그럴 일은 없을 듯하지만, 볼따구니의 살집이 한 점의 긴장도 없이 추욱 늘어지거나, 욕심의 뱃구레가 오크통처럼 불거져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았으면 싶다.

 

  집, 표범이 아니라도, 실은 내 몸도 한 채 집이었구나.

 

 

 

한라산에서

 

  처음 오르는 길에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두 번째 오르는 길에도 말 한마디 걸어주지 않았다

 

  세 번째 오르는 길에서야 바람 한 줄기 얻어맞았다

 

  네 번째 오르는 길에 다리 한쪽 접질러주었다

 

  마른자리에서나, 방 안에서나, 수음 버릇처럼 시 쓰다 온 작자, 네 글은 너무 작다고, 하다못해 저기 깨어진 기왓장, 돌멩이 하나에도 어려 있을, 역사 될 노래 쥐뿔도 멀었다고, 크고도 희게 벗은 몸으로, 한 나라의 가장 마지막까지의 山陰(산음) 하나여, 높고도 고요하다.

 

 

 

雨氣(우기) 아래

 

  공친 김()이 슬레이트 지붕 쪽창 밑으서, 닷새 남짓 걸친 빤쓰 골마리에 손두덩 한 짝을 순하게도 묻고, 쩌어기, 영광 원자력발전소 수챗구녁 어름 빈 바다같이, 새우는 읎고 새우 그림만 그려져 있는, 새우깡 봉다리 닮은 꾸겨진 낮잠에 빠졌다. 김생에겐, 밀린 것이 빨래뿐이 아니다. 봄 꽃잎이라면 늦피었겠고, 夏節(하절) 것이라면 서둘러 벙글었을, 흰 꽃잎 몇 잎도, 마당귀 어쩐지 불어터진 밥풀테기 모냥인데, 밀린 것들에게 좀 셨다가 가라믄서,

 

  작년, 재작년 밀린 빗줄기만 허천나서.

 

 

 

모자를 하나쯤

 

나와 함께 견디고 왔을 가난한 시간 위에도

하나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잘 변하지 않던 습관에게도

하나쯤

햇볕에 그을려 자꾸만 늙어가는 목덜미에도 하나쯤

내 쓸쓸한 눈매라거나 이마 위에도 하나쯤

 

외양에는 별다르게 신경을 써본 일이 없던 나로서는

좀 엉뚱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지금과 같은

심경의 변화 위에도 하나쯤

 

예전과 같이 억지로 밀어붙이거나 힘으로는 말고

제법 이처럼 공손해진 손길과 마음으로

되도록이면 사뿐하면서도 폼이 나도록 하나쯤

 

정말로 주머니가 좀 헐렁해져도 좋으니

제대로 된 모자점에서 하나쯤

 

거울을 보기 위하여, 머리 한쪽을 벅벅 긁어 보이며

멋쩍은 표정으로 그 앞에 서보기도 하는

거기 비쳐 있는 너를 향해서도 하나쯤

 

굴렁쇠처럼 멀어져가는 세월의 뒷그림자에게도

손이라도 흔들어주는 마음같이

하나쯤.

 

 

 

젖을 향하여

 

열두 개쯤 되어 보이는

마음껏 불어난 탱탱한 젖통을

땅바닥 가깝게 늘어뜨리고

집을 향해 돌아가는

어미 개 한 마리를 본다

 

이때쯤이면 한낮의 햇빛들도

젖을 향하여, 일제히 제 빛을 모은다

 

나도 모르게 젖을 향하여

차렷, 거수경례를 하고 싶어진다.

 

 

 

안쪽을 위하여

 

소싯적에 신발 바깥쪽에 신경을 쓰곤 했던 것인데

요즘 들어서, 발가락에 자주 땀이 차는 걸 느끼면서

어쩌다 그렇게 신발의 안쪽을 들여다보게도 되었다

큽큽한 발 냄새가 먼저 와서 들키는가 싶더니

끌고 온 길들의 요철, 지난 시간의 버짐 같은 기억들이

껌처럼 들러붙어 있는 것을 마주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신발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

한때는 그렇게 바깥쪽을 향하여

온전히 빛이 나기를 바랐던 열망의 반대쪽에 자리한

순식간에 코를 싸쥐게도 하는 그것이

신발을 더더욱 신발답게 하는 안쪽의 일이었음을

유심한 마음으로 느껴보기도 한다.

 

 

                     * 정윤천 시집 구석(실천문학사, 2007)에서

                                       * 사진 : 얼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