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의 시(4)

♧ 소록도에서 온 편지
팔 없는 팔로 너를 껴안고
발 없는 발로 너에게로 간다
개동백나무에 개동백이 피고
바다 위로 보름달이 떠오르는 밤
손 없는 손으로 동백꽃잎마다 주워
한 잎 두 잎 바다에 띄우나니 받으시라
팔 없는 팔로 허리를 두르고
발 없는 발로 함께 걷던 바닷가를
동백꽃잎 따라 성큼성큼 걸어오시라

♧ 나뭇잎 사이로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라
모든 적은 한때 친구였다
우리가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지 않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
고요히 칼을 버리고
세상의 거지들은 다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라
우리가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지 않고
어떻게 눈물이 햇살이 되겠는가
어떻게 상처가 잎새가 되겠는가

♧ 그리운 목소리
나무를 껴안고 가만히
귀 대어보면
나무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행주치마 입은 채로 어느 날
어스름이 짙게 깔린 골목까지 나와
호승아 밥 먹으러 오너라 하고 소리치던
그리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 새벽의 시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뭇잎이 나무의 눈물인 것을
새똥이 새들의 눈물인 것을
어머니가 인간의 눈물인 것을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무들의 뿌리가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새들이 우리의 더러운 지붕 위에 날아와
똥을 눈다는 것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거리의 노숙자들이 잠에서 깨어나
어머니를 생각하는 새벽의 새벽이 되어서야
눈물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

♧ 종소리
사람은 죽을 때에
한번은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새들도 죽을 때에
푸른 하늘을 향해
한번은 맑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나 죽을 때에
한번도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지 못하고
눈길에 핏방울을 남기게 될까봐 두려워라
풀잎도 죽을 때에
아름다운 종소리를 남기고 죽는다는데

♧ 봄비
어머니 장독대 위에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달님에게 빌으시다
외로운 개들이 짖어대던 정월 대보름
어머니 촛불을 켜놓고 달님에게 빌다가 돌아가시다
정한수 곁에 타다 만 초 한 자루
우수가 지나고
봄비에 젖으시다
*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열림원, 1998)에서
* 사진 : 개복숭아꽃(필터 - 수채화 효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