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정윤천 시집 '구석'의 시(3)

김창집 2022. 3. 28. 01:54

 

멀다라는 말

 

  (오후의), 한 사람의, (빈들을 가로지르며), 전생을 싣고, (기자가), 꽃상여가, (가는 모습은), 산굽이 도는 순간은, (술프다), 아프다.

 

  멀리서 오고 있는 것들도 그렇겠지만

  먼 곳을 향해 떠나가는 것들의

  뒷모습은

  한결같이 그렇다

 

  입술 사이로, 가만히 되뇌어보는

  멀다

  멀다

  머얼다라는 그 말.

 

 

 

月映橋(월영교)에서

 

오솔길 닮은 저 허공의 길은 충분히 눈에 부시어

회랑처럼 이어진, 月映(월영)의 사위는 사뭇 아름다웠네

그리운 기억 하나 가슴에 묻어두고 사는 이라면

혼자서라도 건너갔다 오라며 등 떠밀어주고 싶었는데

그러면 거기 먼 길 홀로 흐르던 귓속말 같은

강물의 전언이 들려올 것도 같았네

흘러가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물결처럼

이루고 싶었던 마음의 절실함이라면

천년의 세월 뒤에서라도

마주치게 될는지 모른다고

 

고즈넉했던 답교 끝의 서늘한 저물녘을 돌아 나오다가

월영교*

달빛은 제 귀밑머리 몇 올 헤적이듯 쓸며 오를 적에

禁戒(금계)에 빠져버려도 상관없는 마음이 되어

이미 건너온 다리 너머 저쪽을 되돌아보기도 했던 것은

어느 생에선가 다시 한 번쯤

눈썹 짙은 여자 가까이 태어나보고 싶어졌던

난데없이 찾아든 열망 때문만은 아니었네

부서져 추락하려는 달빛 때문이 아니었네

아무래도 믿기 어려운 지상에서의 건널목의 이름으로

월영교는 여기 있었네.

 

---

*안동댐 아래 놓여 있는 아름다운 나무다리. 난간에 설치된 분수가 물을 뿜는 시간이면, 강심에 무지개가 서리는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

 

공음에 다녀오는 길에 면소의 약국에 들렀다

파리똥이 낀 선반에서 먼지 쓴 파스 상자를 더듬던

약사의 손길이 한참이나 더디다

초점이 먼 눈빛 너머로 건너다보이던 그의 날들이

느리게 느리게 거스름돈을 헤아리고 있을 때

어느 후미진 마을의 지명과,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어깨를 겯고 저물어간다는 일이

때로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이웃의 잡일로

공음에 한번 다녀와야 하는 경우가 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길가엔 가을꽃들이 피었다 그것들은 바람 속으로

약사마냥 느린 몸짓을 흔들어주기도 하였는데

수중에 카메라를 지니고 있었다면

잠시 길을 멈추고 흑백사진을 한 장 찍어두고 싶었다

허름한 모퉁이 다방, 구석진 자리에 걸터앉아

흑백사진 속에는 인화되지 않을 빛깔, 연분홍 닮은

추억의 일들이며, 초록의 지난 시간들을

나도 느린 손길로 가만히 쓰다듬어보고 싶기도 했다

 

먼지 쓴 파스 봉투가 잘 뜯어지지 않아

한참이나 애를 먹었던 시간 속으로

늙은 약사는 흘러간 세월 같은 거스름돈 몇 닢을

천천히 건네주었다.

 

 

 

 

저를 다하여 하냥 온기를 게워 올리는

 

향처럼 피워 올리는

 

둥근 지붕부터 헐어 몸 열어주던

 

거기, 원적외선 담요보다

 

푹신하고 느른한

 

寺院(사원) 같던, 입으로 읽었던.

 

 

 

그 광장의 요기*

 

  성산포항 매표소 건물 광장 앞에 나서면 2분에 한 켤레꼴로 구두코에 광을 다잡는 재바른 손길이 하나 자리 잡고 계신다. 한바탕의 風雨를 불러내기라도 하는 듯 연주처럼 휘몰아치는 그의 손길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인간은 본래 하게 태어나서 해진다라던 오래전의 가설 하나를 떠올려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白手였을 그의 손 매듭 언저리엔 까맣게 땟자국이 고여 있다.

 

  난독의 우파니샤드 한 구절 펼쳐들지 않더라도, 앉은뱅이 요가 30년 공력의 그 앞에 가면, 제아무리 닳고 해진 고린내 뒤창인들 순식간에 선해지고 만다.

 

---

*요가 수행자.

 

 

                   * 정윤천 시집 구석(실천문학사, 200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