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2022년 4월호의 시(2)
♧ 반려견 - 최연수
지구의 작은 점, 교감이라 불리는 그곳이 우리 집이야
말을 가두어도 서로를 알아듣는
따스한 지붕
당기고 커닝하는
즐거운 비밀이잖아
건반은 폐기된 기분을 연주하고 너는 소리를 냄새 맡네
옆으로 나란히
냄새로 듣는 거야
눈빛을 주고받으며
네 왼쪽 귀는 내 오른손이 잡고
줄이 출렁거리는 건 소리가 떨리기 때문
네가 가장 믿는 곳으로 소리가 망연히 내려다보고 있네
싱싱한 귀를 쥔 채
사람 같은, 그러나 사람 아닌 사이로 청력 잃은 바람이 길을 들어
나는 그 마음 가장자리를 걸으며
왈왈, 코를 박고 즐거워해야지
새 귀 줄게 헌 귀 줄래
눈동자를 뒤적이면 십사 년이 고여 있을 것 같아
너를 부르면
눈물이 눈을 허물며 일제히 쏟아질 것 같네
♧ 누이꽃 - 윤태근
첫눈이 내린 아침
내 발자국을 새기며
산책하는 중이었다
금이 간 담장 위에서
홀로 떨고 있는
꽃 한 송이를 만났다
새파랗게 질린 하늘을 이고
된바람에 흔들리는
가녀린 얼굴
- 이년이 죽어야 에미가 살 수 있지!
멀건 미음을 떠먹이며 주문처럼 외우던 할머니
두어 달 연명하던 누이는
백일도 못된 섣달 이렛날
둘둘 강보에 싸여 뒷산으로 지고 말았다
삭풍이 기승을 부리던 날이다
시린 시절 아프게 져버린
가엾은 누이야〜
어룽비치는 눈으로 두 손 벌려 감싸니
기다렸다는 듯 떨어지는
붉은 꽃송이!
♧ 접수를 읽다 - 황병숙
문 앞에 세숫물 뿌려 흙꽃* 가라앉히듯
메마른 눈물샘에 마중물 뚝 떨군다
냉랭한 가슴까지 흘러 철벅이는 담금질
잇몸으로 견뎌온 어른들 다시 만날 때
발 씻은 물까지도 꽃밭에 주는 어머니
새벽일 마다치 않는 아버지가 보인다
물 없이도 선인장 꽃피어 환한 대기실
오늘도 마스크 너머 젖은 눈을 읽으며
건네는 따뜻한 안부 불씨처럼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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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의 방언
♧ 학림다방에서 – 이순향
도심 속 작은 섬에
세월이 잠겨 있다
빛나는 청년들이
고뇌하던 활화산터
잊혀진
청춘 우려서
차 한 잔 대접한다
♧ 부활절 – 유동승
마주칠 수는 있어도 마주할 수는 없는
거리두기
봄이 아니라는 너를 두고
봄은 아프다고 읽는다
투명 플라스틱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손을 모았지
포르테… 포르티시모 믿음이
햇살을 차려낸다
얼마나 지났을까
유리창은 점점 커지고
식은 빛을 입힌다
당신의 핏자국에서는 꽃이 피고
인큐베이터 속에 무정란의 병아리들
부시럭부시럭 날개를 편다
♧ 키 작은 심지 - 김정식
국화 향 퍼지는
사십구재 법당,
여섯 살 여자아이가
영정 앞에서
갈잎처럼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엄마한테 갈 거야”
하얀 꽃잎이
아미타불에 일렁였습니다.
노스님은 잠시
염불을 멈추고,
촛물 가득한 촛대에
바람에 꺼질 듯
흔들리는
키 작은 심지를 일으켜 세우며
젖은 눈망울에
촛불을 밝혔습니다.
* 월간 『우리詩』 2022년 4월 406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