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권경업의 '봄 시편'과 현호색

김창집 2022. 4. 9. 00:00

 

당신은 누구십니까

 

혹여 키 낮은 풀꽃 아닐런지요

겨우내 아린 꽃물 품어

보아줄 이 있건 없건

조그만 꽃부리 애써 여는 당신은

세상의 아름다움 위해서입니다

 

소리 낮추어 피는 감자난초 족두리풀

듣기에도 어색한 개불알꽃 고슴도치풀

이름 한 번 불릴 일 쉽지 않은 이 땅에

말 없는 노랑제비꽃

연보라 노루귀, 꿩의바람꽃

천덕꾸러기 엉겅퀴 들꽃이라도

세상의 아름다움 위해서입니다

 

무심히 스치는 길섶, 하찮다지만

먼지만한 씨앗으로 세상에 오던 날

하늘에는 바람, 땅에는 비 내렸습니다

척박한 땅 싹 틔워 질긴 뿌리 내리라는

그 가르침

 

당신은 누구십니까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가버린 봄은

돌아와 다시 꽃 피운다지만

떠나간 그대는, 다시

오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두고 떠날 때

말하진 않았어도 오죽 했을 그 마음

기꺼이 멀어져 그리움 되어준

내 삶의 소중한 한 사람이여

그대와의 인연 다했다는 걸 알면서도

저 윤중로 벚꽃 봄비에 다 지도록

나는 기다립니다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지는 꽃그늘의 쓸쓸함과

세상 숱한 설움의

견딜 수 있는 힘이겠기에

 

 

 

봄은 소리다, 누군가의

 

봄은 소리다, 누군가의

거칠어진 마음에 새순 돋는 소리다

 

어쩌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눈 감고서도 훤한, 취밭목

잔설 위로 오솔길 피어오르는 소리다

 

아직도 못 다한, 한 시절

발그랗게 얼굴 달아오르는 소리다

 

여리디여린 어느 품에

얼레지, 제비꽃 꽃망울이

꽃샘바람에 터지는 소리다

 

귓바퀴 손 모아 다가가는

내 가슴 콩닥거리는 소리다

 

 

 

사랑도 이와 같아서

 

발에 꼭 맞는 신발이

어디 잘 있습니까

신다보면 때로는 뒤꿈치도 까지고

터진 물집도 갈앉고 해서 편해지면

그때부터, 먼 길이던 험한 길이던

함께 갈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나

사랑도 이와 같아서

때로는 삐걱이고 고통스럽더라도

굳은살 앉을 때까지 참고 가야지요

 

한때는, 보드랍고 뽀얗던 고 앙증맞은 그 발의

오래된 신발로 남고 싶었습니다

 

 

 

너는 흔적이라 하지만

 

흔적이 아니다

가늘고 긴, 하얀 손끝으로

차곡차곡 쌓여진 견고한 유적이다

 

한 사내의 황량한 가슴에

허물어질 수 없는

부동不動의 성채城砦

그 이름은

 

 

 

어둠도 빛만큼 중요합니다

 

어둠도 빛만큼 중요합니다

잿마루 한낮의 보이지 않는 별들

결 고운 밤하늘에만 반짝이듯

 

나는 어둠입니다

그대 감추어 둔 영혼 더욱 영롱하게 할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세상 깊은 꿈결이면

산중의 어둠 한결 맑아

그 어둠 짙은 만큼

계곡과 능선 위의 별 더욱 초롱하고

그 초롱함은 다시

어둠의 숨결이 되기에

 

! 이밤 누군가는

그 별빛에 살아 숨쉬고 있음을 아시는지요

 

 

          *권경업 시집 사랑이라 말해보지 못한 사랑이 있다면(명상, 2002)에서

                                          *사진 : 현호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