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업의 '봄 시편'과 현호색
♧ 당신은 누구십니까
혹여 키 낮은 풀꽃 아닐런지요
겨우내 아린 꽃물 품어
보아줄 이 있건 없건
조그만 꽃부리 애써 여는 당신은
세상의 아름다움 위해서입니다
소리 낮추어 피는 감자난초 족두리풀
듣기에도 어색한 개불알꽃 고슴도치풀
이름 한 번 불릴 일 쉽지 않은 이 땅에
말 없는 노랑제비꽃
연보라 노루귀, 꿩의바람꽃
천덕꾸러기 엉겅퀴 들꽃이라도
세상의 아름다움 위해서입니다
무심히 스치는 길섶, 하찮다지만
먼지만한 씨앗으로 세상에 오던 날
하늘에는 바람, 땅에는 비 내렸습니다
척박한 땅 싹 틔워 질긴 뿌리 내리라는
그 가르침
당신은 누구십니까
♧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가버린 봄은
돌아와 다시 꽃 피운다지만
떠나간 그대는, 다시
오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두고 떠날 때
말하진 않았어도 오죽 했을 그 마음
기꺼이 멀어져 그리움 되어준
내 삶의 소중한 한 사람이여
그대와의 인연 다했다는 걸 알면서도
저 윤중로 벚꽃 봄비에 다 지도록
나는 기다립니다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지는 꽃그늘의 쓸쓸함과
세상 숱한 설움의
견딜 수 있는 힘이겠기에
♧ 봄은 소리다, 누군가의
봄은 소리다, 누군가의
거칠어진 마음에 새순 돋는 소리다
어쩌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눈 감고서도 훤한, 취밭목
잔설 위로 오솔길 피어오르는 소리다
아직도 못 다한, 한 시절
발그랗게 얼굴 달아오르는 소리다
여리디여린 어느 품에
얼레지, 제비꽃 꽃망울이
꽃샘바람에 터지는 소리다
귓바퀴 손 모아 다가가는
내 가슴 콩닥거리는 소리다
♧ 사랑도 이와 같아서
발에 꼭 맞는 신발이
어디 잘 있습니까
신다보면 때로는 뒤꿈치도 까지고
터진 물집도 갈앉고 해서 편해지면
그때부터, 먼 길이던 험한 길이던
함께 갈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나
사랑도 이와 같아서
때로는 삐걱이고 고통스럽더라도
굳은살 앉을 때까지 참고 가야지요
한때는, 보드랍고 뽀얗던 고 앙증맞은 그 발의
오래된 신발로 남고 싶었습니다
♧ 너는 흔적이라 하지만
흔적이 아니다
가늘고 긴, 하얀 손끝으로
차곡차곡 쌓여진 견고한 유적이다
한 사내의 황량한 가슴에
허물어질 수 없는
부동不動의 성채城砦다
그 이름은
♧ 어둠도 빛만큼 중요합니다
어둠도 빛만큼 중요합니다
잿마루 한낮의 보이지 않는 별들
결 고운 밤하늘에만 반짝이듯
나는 어둠입니다
그대 감추어 둔 영혼 더욱 영롱하게 할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세상 깊은 꿈결이면
산중의 어둠 한결 맑아
그 어둠 짙은 만큼
계곡과 능선 위의 별 더욱 초롱하고
그 초롱함은 다시
어둠의 숨결이 되기에
아! 이밤 누군가는
그 별빛에 살아 숨쉬고 있음을 아시는지요
*권경업 시집 『사랑이라 말해보지 못한 사랑이 있다면』(명상, 2002)에서
*사진 : 현호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