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의 시(5)

♧ 후회
그대와 낙화암에 갔을 때
왜 그대 손을 잡고 떨어져 백마강이 되지 못했는지
그대와 만장굴에 갔을 때
왜 끝없이 굴속으로 걸어 들어가 서귀포 앞바다에 닿지 못했는지
그대와 천마총에 갔을 때
왜 천마를 타고 가을 하늘 속으로 훨훨 날아다니지 못했는지
그대와 감은사에 갔을 때
왜 그대 손을 이끌고 감은사 돌탑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는지
그대와 운주사에 갔을 때
운주사에 결국 노을이 질 때
왜 나란히 와불 곁에 누워 있지 못했는지
와불 곁에 잠들어 별이 되지 못했는지

♧ 입산
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너는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너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
너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한참 길가에 앉아
배가고픈 줄도 모르고
시들어가는 민들레 꽃잎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길은 끝이 없었다
지상을 떠나는 새들의 눈물이 길을 적셨다
나는 그 눈물을 따라가다가
네가 들어간 산의 골짜기가 되었다
눈 녹은 물로
언젠가 네가 산으로 내려올 때
낮은 곳으로 흘러갈
너의 깊은 골짜기가 되었다

♧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불국사 종루 근처
공중전화 앞을 서성거리다가
너에게 전화를 건다
석가탑이 무너져 내린다
공중전화카드를 꺼내어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린 뒤
다시 또 전화를 건다
다보탑이 무너져 내린다
다시 또 공중전화 카드를 꺼내어
너에게 전화를 건다
청운교가 무너져 내린다
대웅전이 무너져 내린다
석등의 맑은 불이 꺼진다
나는 급히 수화기를 놓고
그대로 종루로 달려가
쇠줄에 매달린 종메가 되어
힘껏 종을 울린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 꽃다발
네가 준 꽃다발을
외로운 지구 위에 걸어 놓았다
나는 날마다 너를 만나러
꽃다발이 걸린 지구 위를
걸어서 간다

♧ 철길에 앉아
철길에 앉아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철길에 앉아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멀리 기차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기차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코스모스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기차가 눈 안에 들어왔다
지평선을 뚫고 성난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며
기차는 곧 나를 덮칠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낮달이 놀란 얼굴을 하고
해바라기가 고개를 흔들며 빨리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었다

♧ 꿈
눈사람 한 사람이 찾아왔었다
눈은 그치고 보름달은 환히 떠올랐는데
눈사람 한 사람이 대문을 두드리며 자꾸 나를 불렀다
나는 마당에 불을 켜고 맨발로 달려 나가 대문을 열었다
부끄러운 듯 양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눈사람 한사람이
편지 한 장을 내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밤새도록 어디에서 걸어온 것일까
천안 삼거리에서 걸어온 것일까
편지 겉봉을 뜯자 달빛이 나보다 먼저 편지를 읽는다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열림원, 1998)에서
* 사진 : 모과나무 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