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박남준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의 시(1)

김창집 2022. 4. 13. 00:44

 

 

어린 찻잎

 

어린 찻잎이 화염 타오르는 솥 안에서

다작다작 茶雀다작 휘돌며 춤을 춘다

싱싱한 것들이 연초록 봄빛들이

화르릉 달아오른 불길을 품고 껴안으며

풀이 죽고 숨이 꺾인다

꺼내어져 둥근 빨래처럼 비벼지고

모아졌다 풀어졌다 다시 뜨거워진다

온몸 비틀리며 말라간다

어찌하여 향기는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가

 

차를 덖다가 그랬다

한 잎 찻잎이 온전히 솥에 던져져

초록의 향기로움 세상에 전하듯이

사람의 삶도 상처를 통해서야

비로소 깊어지는가

남김없이 수분을 빼앗기고 바짝 뼈마디 뒤틀린 것들이

찻물에 띄워지며 새록새록거리는 아기 숨소리

 

처음 어린 찻잎으로 거듭나며 내 몸에 안긴다

찻잔에 담긴 푸른 바람의 하늘과 별빛

저 이슬 고요하고 그윽한

 

 

 

 

최대의 선물

 

꽃이 피어나는 건

당신을 향한 내 사랑 때문이다

지금 별똥별이 반짝이는 건

이 밤 당신께 보내는 연분홍 편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산들이 푸른 숲으로 샘물을 품고 있는 것

강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인생의 나침판을 삼으라고

당신이 내게 보여주는 선물인 것이다

 

 

 

 

놀라워라

 

낙엽 하나 땅에 떨어졌다

어떤 나비의 애벌레에게 몸을 내주었나

삭은 뼈처럼 드러난 잎맥들 방울방울

이슬을 매달아 햇빛을 굴린다

그 모습 열반한 선승의 사리 아닌가 생각하는데

몸의 어느 구석에 생기가 남아 있었던가

가을볕에 뒤척이다 발끝부터 토르르-

동그랗게 말았다 번데기 같다

가지에서 떨어져 허공을 부유하다

나비를 꿈꾸었는가

놀라워라 저 낙엽

 

 

 

 

화엄사 각황전 옆 적매화 꽃잎 땅에 떨어져

 

저건 절명이다 아니 화엄이다

 

붉은 절정의 적매화 꽃잎 땅에 누워 그대로 와불이다

 

아스라이 흩어진 허공중의 윤회를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화엄사 각황전 옆 적멸로 오르는 돌계단이 가파르다

 

 

 

 

군불견,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君不見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절정을 건너온 매화꽃잎이 바람에 휘날린다

향기로운 매화의 봄은 그새 가고 마는가

이제 내일의 시간이란

짧다 지천명의 나이

꽁꽁 얼음이 얼고 삼월 춘설

백발가를 불러주랴 눈발은 휘날리는데

뜰 앞의 진달래 꽃봉오리

초경의 가시내 젖멍울로 부풀었다

어떤 그리움으로

이렇게 성급히 마중을 나왔더란 말이냐

이대로 연분홍치마 드리울 수 있겠느냐

君不見, 눈 들어 차마 못 보겠다

네 붉은 머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랴

마음이 바람 곁을 맴돈다 어지럽다

연분홍 늙은 그리움아

 

 

 

 

봄날은 갔네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또 저렇게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십리벚길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피어 꽃 사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나는 꽃들

먼저 왔으니 먼저 가는가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 날린다

꽃길을 걸으며 웅얼거려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 대궐이라더니

사람들과 뽕짝거리며 출렁이는 관광버스와

쩔그럭 짤그락 엿장수와 추억의 뻥튀기와 뻔데기와

동동주와 실연처럼 쓰디쓴

단숨에 병나발의 빈 소주병과

우리나라 사람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그래 그래 저렇게 꽃구경을 하겠다고

간밤을 설렜을 것이다

새벽차는 달렸을 것이다

 

연둣빛 왕버드나무 머리 감는 섬진강 가

잔물결마저 눈부시구나

언젠가 이 강가에 나와 하염없던 날이 있었다

흰빛과 분홍빛 붉고 노란 봄날

잔인하구나

누가 나를 부르기는 하는 것이냐

 

 

          * 박남주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실천문학사, 201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