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계간 '제주작가' 2022년 봄호의 시(1)

김창집 2022. 4. 15. 23:46

 

오몽 강봉수

 

벳이 볼그랑

생이도 울엄신디

아직도 ᄌᆞᆷ 미쳐시냐

 

느렁태로 살앙 어떵 살젠

베꼇디 나강도 정 헴신가

제게 일어나라

 

족은 밧 냉겨

수눌디도 읏엉

어멍아방 꽝이 휘염시네

 

오몽ᄒᆞ라 오몽해사 산다

ᄌᆞᆷ 미쳥 죽은 귀신 우리집에 읏다

흥글엉 깨우기라도 해사 사름 뒌다

 

 

 

노추(老醜) 방지 십계명 김경훈

 

하나, 세상의 관심에서 흔쾌히 멀어지라.

, 숟가락 얹으려 말고 머릿수 하나 채워라.

, 뭘 챙기려 말고 지갑 먼저 열어라.

, 후배들의 술잔과 당당히 평등해지라.

다섯, 입안 가시 돋기 전에 책 한 줄 읽어라.

여섯, 주도하려 말고 궂은일부터 먼저 하라.

일곱, 손톱 속에 항상 흙 때가 끼어 있으라.

여덟, 왕년을 아집하지 말라 지금을 말하라.

아홉, 유행이나 시류에 철저히 아둔해지라.

, 제 뜻대로 살고 제 멋대로 죽어라.

 

 

 

겨울 비 김대용

 

빙판을 기어가던 체인 풀리는 소리 내며

겨울바람이 기어이 창 틈 뚫고 온다

벽에 한 장 남은 달력 찢어내는 손끝에

서 있던 언제나 불빛 흐르는 등대

가끔 불 꺼도 감겨지지 않는 눈꺼풀

불 켜도 감겨지는 눈꺼풀

마주 보고 서 있는 불면(不眠),

눈 길 발자취 없이 묵묵히 걷는

시간 걸친 낡은 코트.

매일 아침 의문부호로 넥타이하고 나선다.

한 겹 두 겹 침묵으로 쌓인

아직도 구석진 골목길마다 뿌려지는 비

 

 

 

새 안경을 쓰면서부터 김병택

 

고급 안경이 아니어서 그런 것일까

새로 장만한 안경을 쓰면서부터

쓸데없는 사물들이 가끔 보였다

 

안개 낀 해변을 걷던 중년 사내가

갑자기 새 안경 앞에 멈추어 섰고

 

터키의 어느 화산에선가 피어오르던

붉은 연기가 새 안경 앞에 어른 거렸다

 

길에서 본 사람을 그냥 보내지 못해

어려운 대면을 끝내고 헤어질 때

공중을 느리게 배회하던 생각들이

새 안경 앞으로 다가와 멈추었다

 

세상을 다 투과하지 못한 렌즈의 불안이

새 안경 구석에 까만 점으로 모였다가

깊은 밤엔 침실의 천정을 빙빙 돌았다

 

희미했던 내 시력이 더 희미해진 것도

새 안경을 쓰면서부터 생긴 변화였다

 

물론 새 안경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모두 새 안경을 쓴 내 탓임이 분명했다

 

 

 

백일몽 김수열

 

미역 베러 왔소, 낫은 어디 있남?

 

화들짝 놀라 선잠에서 깨어보니 꿈이라

여섯 해 전 애비 따라 하늘로 먼저 간 아들이

저 평상에 떠억 하니 앉아 눈도 안 마주치고

미역밭만 바라보는 거라

관세음보살

 

여든이 문턱에 걸린 맹골죽도 김씨 할머니는

녹아내린 관절 때문에 미역밭으로 나서지 못하는 대신

하마 아들을 볼까 문지방 베고 꿈길 나선다

낫 대신 지팡이 옆에 두고

 

 

 

거친오름 뫼제비꽃 김순남

 

언 땅을 깨고 일어서기 위해

풀들은 저마다의 심장을 두드리고

손을 뻗는 뿌리의 힘으로 꽃피는 줄을

 

천 갈래 만 갈래의 서리 박힌 살은

시린 이를 부딪치는

만삭의 대지를 씻으며

빌레왓 곶자왈을 짐승처럼 기어 나온 순애 씨!

당신을 공비라 하던가요

 

1956년 교래 어디서 잡혀온 다섯 사내들 틈에서

22살 앳된 처녀를 취조하던 한 경사!

그녀의 흔들리는 마음 깊이에서

폭도와 경찰의 동거 살이 2년여,

그 인연의 살핌도 기특하여이다

 

봄이 오는 산빛처럼

내 연모의 땅 거친오름 아래

사월 바람도 몸을 풀고

뫼제비 분홍 꽃잎으로

다문다문 내려서는 줄을

 

 

                         * 계간 제주작가2022년 봄호에서

                                  * 사진 : 꽃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