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성 시집 '빈 길'의 시(1)
♧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슬픈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슬프지 않을 것이다
몇 백 년 판쳐온 존재하지 않는 것들
때로 슬프고
때로 고통스럽고
때로 행복하다 우리는
얼마나 나위 없는 바보인가
무릉도원
이어도
유토피아
자유
평등
박애
산타클로스
파라다이스
시
지옥
♧ 빈 수레꾼들 빈 행진
시대 역사 까먹는 자들 빈 논리
누가 읽는가 스테판 말라르메
누가 읽을 수는 있는가
한글로
아니면
영어로…… 그럼
읽을 수야 있지
빈 수레꾼들 빈 행진
엉터리들
천재들
빈 웃음소리들
♧ 빈 길
사라져버렸다 내가 다니던 길
끝내
찾을 수 없다
바람이 되었나
바람 불면 흙먼지에 휩싸여
먼지투성이 되던 길
늦여름
저물녘
시뻘겋게 지는 해
가슴에 품고 저마다
찬란한 금빛 비상 마련하는
고추잠자리들
쫑 쫑 쫑
날아다니던 그
빈 길
♧ 고사리
봄비 내린 뒤
고사리 꺾는다
새 봄 꺾는다고 히히대는 잡종들
속에
나는
없다
고사리
도르르
새순 새파라니
피워 올리는
할마니
하르방
어멍
연둣빛
봄비
젖는
꿈
속에
있다
나는
♧ 미친 짓거리
깊은 밤 지나
새벽 5시
잠이나 잘 일이지
별 것 없는 시 쓴다고
한밤
지새우다니
아, 아!
이보다 더 슬픈 일 있을까
싸구려 담배 ‘새마을’ 한 갑
사지도 못할 시
한 편 쓰지도 못하고
‘TIME’ 한 갑 다 태우며
♧ 삶을 위하여
벗겨내어야 한다 빈 껍질은
벗겨내어도 속살이
안 보이면 다시
벗겨내어야 한다 빈 껍질은
속살이
보일 때까지
혼이
비칠 때까지
* 문충성 시집 『빈 길』(각, 200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