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행순 시집 '간호사도 가을을 탄다'의 시조(4)
♧ 행원 바다
사백 년 전 광해가 배 타고 온 행원포구
예닐곱 살 소녀들이 숨바꼭질하고 있다
저 바다 자맥질하면 못 찾겠다
진희야
♧ 백치미 사랑
서산에 해 걸리고 낙엽이 떨어진다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는 마른 잎새
민오름 저 둘레길은 또 그렇게 지쳐간다
외진 돌 무덤가 한 남자 앉아있다
어느 가을 남몰래 감춰둔 으름열매처럼
둘레길 백치미 사랑 다시 잃은 것일까
쓰러진 저 소나무 누굴 기다리는 걸까
사랑한다 사랑한다 바보처럼 다 놓치고
그리움 가슴에 묻고 다시 길을 떠나는
♧ 황색등
허겁지겁 출근길 5 · 16도로 들어서면
빨강과 초록 사이 멈춰선 아버지의 시간
한사코 외면을 하는 양지공원 봉안소
낼모레가 기일 날 그냥 확 좌회전할까
아버지 바람기도 용서되는 가을날
돌담에 털머위마저 노란 낮달 피워낸다
♧ 부부
늦눈 몇 송이 내려앉는 왕이메오름
한때는 치사랑의 독약 같은 그리움도
이제는 따져 뭣하랴
너도 나도 바람꽃인 걸
♧ 토끼섬
오랜만에 바람 따라 물 따라 나섰는데
구좌읍 하도리 1번지 토끼섬이 보이네
이제껏 어디 숨었다 폴짝 뛰어 나왔니
낚싯대 하얀 뱃길 저 섬 끌고 갔는지
신병 들린 무당처럼 내 가슴도 끌고 간다
못다 쓴 습작시 한 줄 어디에나 놓고 갈까
가을 바다 떠도는 내 길은 어디쯤일까
썰물도 문주란도 편지처럼 접어놓고
길 하나 물에 잠기며 섬이 되는 사람아
* 윤행순 시집 『간호사도 바람을 탄다』 (문학과사람,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