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조와 황근
♧ 한라산 곶자왈에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산다 - 김연미
나는 너무 작아서
눈에 띄지 않아요
나는 너무 가벼워서
머물 수도 없어요
당신의 숨결만으로 나는 위태로워요
으름난초
제주물부추
섬에 사는 휘파람새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예요
햇살의 떨림을 엮으며 안개처럼 살아가죠
문을 열지 말아요
실험은 그만둬요
살아있을 확률을 장담할 수 없어요
당신의 관심 밖에서
나는 영원할 거예요
♧ 청별항淸別港 - 김영란
얻었다고
기뻐 마라
잃었다고
아쉬워 마라*
하늘과 통하는 곳에
방 하나면 족한 것을
깨끗이 떠나보내니
마음 맑아 안 좋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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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의 시 일부를 인용함.
♧ 프러포즈 – 김정숙
태초부터
우리가 당신 사이였나요
신이 머무르는 공간을 당이라 하고
원초적 당의 주인은
신이었으니까요
할망당은 할망신 하르방당은 하르방신
어떤 사람 어떤 시간이 당신으로 맺어져
제주 섬 은밀한 곳곳 푸르른 이끼처럼
길은 끊어져도
생이 남아 있다면
당을 위한 신의 마음 신을 품은 당의 마음
하가리 할망당 앞에서
우리 당신 할래요?
♧ 냉동고에서 꺼낸 시 - 김진숙
신선도가 생명이면 이미 늦은 것일까
두서없이 쟁여둔 육식성의 붉은 시어들
울음 다 빠져나가도록 모르는 척했다니
얼려둔 마음에도 유통기한이 있다지만
쉽게 풀릴 듯이 순식간에 녹지 않아
저물녘 반성을 꺼내 해동 버튼 누른다
한번 굳은 슬픔은 비틀어진 생선 같아
어제를 잃어버려 푸석해진 내 안의 종족들
다 녹아 풀릴 때까지 슬퍼하고 슬퍼하라
♧ 파치 귤 – 오영호
지난해
버린 파치들이
4월의 귤나무 아래
멀쩡한 모습으로
날 보며
살짝 웃기에
몇 개 골라 들고 왔다
신맛도 달콤함도
옛 맛은 아니지만
그래도 먹을 만하다고
지인들 이구동성에
5개월
썩지 않은 시간
자연의 순리 깨닫다
♧ 줄자 – 조한일
길이를
재고 나면
어둠 속으로 몸을 만다
절대로 길다 짧다
발설하지 않는다
죽어도
이중 잣대로
산 적 없단 증언들
♧ 본향당 가는 길 – 한희정
오곡백화 만발한 고향,
늙은 흑인의 소원처럼
일뤠할망 뵙기 청하는
어머니 묵언정성
새벽길 초이레달이
길마중을 오겠지
가난한 타성바치
어긋나지 않기를…
하천변, 잡목숲 지나
가쁜 숨을 내쉬면
저만치
마음을 여는
조배낭이 우뚝 서있네
* 계간 『제주작가』 2022년 여름호(통권77호)에서
* 사진 : 한창 만개 중인 제주의 황근(黃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