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제주작가' 2022년 여름호의 시
♧ 삼신인의 목소리 – 김병택
-제주박물관에서
화북포구에서 달려온 바람이
넓은 마당 곳곳에 정지해 있는
먼 옛날의 시간들을 빠르게 휘젓는다
삼신인(三神人)의 목소리는
말발굽 소리들이 서로 싸움하듯
한참 동안 난장을 벌인 뒤에야
열린 내 귀에 다가왔다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하늘과 바다가 요동치던 그 모습으로
면면한 생(生)의 줄기를 잇게 한 것은
속절없이 지켜야 할 도덕도
꽃 주위에 모인 팽팽한 향기도
낭랑하게 퍼지는 말[言語]의 경쟁도
질서를 세우는 규율도 아니었다
저쪽 수평선에 자리 잡은 정신이었다
삼신인의 목소리는 박물관 밖에서도
사람들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 비문(碑文) 4 – 김경훈
-이것은 역사의 감옥이다!
역사의 죄인을 추모하는 건
그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박진경이 누구인가
왜왕에게 충성을 맹서한 일본군 소위 출신에
미군정의 지시로 제주4․3학살을 집행하다
부하들에게 암살당한 이가 아닌가.
이런 인간의 추모비가 70년이 넘도록
충혼묘지 언저리에서 충혈된 눈으로
제주섬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에 우리는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이 자의 추모비를 철창에 가둔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 자에 대한 단죄이자
불의로 굴절된 역사의 청산이다.
우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산화한
참된 의인들을 추모하고자 한다.
♧ 대정(大靜)에서 – 강덕환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었는지 알고 싶거든
우선, 여기 대정을 눈여겨보라
송악산 굽도리에서 절지치는 소리 끊이지 않는데
알뜨르 격납고 완강하게 아가리 벌리고 있는데
영절서교(永絶西敎) 축송세관(逐送稅官)
신평리 할망당에서의 맹세가
신축년 창의(倡義)로 휘날리고
단정반대 통일조국 전취
구억 학교마당의 악수가 뒤틀려
무자년 함성의 깃발로 펄럭이던
여기, 대정에 와보지 않고
어찌 가위눌린 분단의 사슬을 끊는
훈풍이 불거라고 쫑알거리나
불다가 지치면
제풀에 사그라질 거라고 하지 마라
구석, 구석으로만 내몰리면서도
찬바람에 시린 손, 제 호주머니로 끌어당겨
체온으로 전해주던 변방의 다짐을, 사랑을
동토를 밀어내는 안간힘을
한낱 거품일 거라고 매도하지 마라
봉홧불 올렸다고, 인공기 게양했다고
특공대 조직했다고 모슬봉 탄약고 터에서
그냥그냥그냥 이유도 모른 주검들이
황망히 까마귀밥이 되었는데
인민위원회에 가입했다고
남로당에 도장 찍지 않았냐고
도피자 가족이라고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한림, 대정, 안덕에서 연행해 온 예비검속자들
그냥그냥그냥 수습조차 못한 주검들
백조일손지지에, 만벵디에 나눠 묻히고
신도리 향사 옆 밭에서, 무릉리 안개동산에서, 신평 곶자왈에서, 알뜨르 염소굴에서, 서림저수지 부근에서, 보성리 동헌 터에서, 인성리 삼한질거리레서, 이교동 대합실 앞밭에서, 돌오름에서, 영실에서, 서귀포 정방폭포에서, 정뜨르 비행장에서, 육지 형무소에서
삼사방으로 삐어졍 돋당
간 날 간 시 모른채
허공중에 떠도는 영혼영신들
맺힌 원정 풀어줍서, 달래줍서
새 가지 새 살로 자라게
주은 땅, 죽은 목숨 살려옵서
징소리, 설쇠소리, 장구소리 대차게 울려
한반도 분단의 철책을 걷어내는 첫걸음
신발 끈 동여매는 곳이
여기, 이 땅, 대정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계간 『제주작가』 2022년 여름호(통권77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