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승 시집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의 시(3)와 분꽃
♧ 슬픔을 말아먹었다
오빠는 엄청 큰 파월선을 타고 맹호부대 군가를 부르며 손을 흔들며 월남으로 갔다. 몇 달 뒤 엄마의 꿈은 풍비박산이 났다. 혼자 키운, 남편처럼 의지했던 아들이었다.
이상한 흐느낌 같은 기척에 자다가 자주 눈을 떴다. 오빠도 오빠지만 엄마의 아픔이 더 아팠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는 열세 살이었다. 엄마는 먼 곳을 응시하다가 물에 만 밥을 꾸역꾸역 먹곤 하였다. 오빠가 밟고 지나갔을 박살난 엄마의 꿈 조각이 박혀 있을 것 같은, 그 땅에 꼭 한 번 가고 싶었다.
전쟁이 치열했다던 중부지역 호이안, 엄마가 꿈에서라도 서성거렸을 거라고 생각했던 울창한 밀림은 없었다. 그때의 참상을 잊은 듯 아직 여물지 않은 벼들이 서 있는 푸른 들녘, 꽃이 되지 못한 꽃들이 비문, 아픈 이름들이 풀밭 위에 여기저기 쓸쓸하게 누워 있었다. 그때의 상처를 아프게 말하고 있었다.
♧ 바람꽃 이름으로
사라오름에서 변산바람꽃을 보았네
땅을 헤집고 낙엽을 들추고 갸웃이 고개를 내밀었네
씨 뿌리는 절기 잊지 않고 찾아와 주었네
작고 어린 것들이 맨몸으로 바람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네
한참 동안 가까이 눈을 맞추었네
바람보다 더 많은 종의 바람꽃이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네
왜 바람꽃일까
꽃이 아닌 바람에게 묻고 싶었네
알 것 같은 그러나 정녕 알 수 없는,
그저 내 삶의 화두 같은 바람을 생각했네
먼 산에게 나무에게 허공에게 구름에게
바람, 하고 소리쳤네
멀리서 묵직한 울림이 따라왔다가 되돌아갔네
마음 밖에서 구하지 마라*
은자는 오늘도 죽비로 등짝을 후려치지만
마음 밖에서만 구하려고 애쓰고 있는
나는, 기다리다 지쳐갔을
바닷가 고향집 녹슨 자물통을 생각했네
교복을 입은 열세 살 단발머리 소녀들이
흑백 사진 속에서 웃고 있네
두고온, 시들지 않는 오랜 기억 속 절기들을
흰 바람꽃의 이름으로 하나하나 불러보았네
---
*임제록(臨濟錄)에서 차용.
♧ 통점
문득 뒤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저 멀고 아득한 길이
고작 숟가락 품안이었네
♧ 세입자
네모난 공간 지나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길 하나 있네
둥근 테 안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폭이 다른 두 발걸음
방향이 같은 것은 까닭이 없네
노란 머리카락 우수수 떨어지는 화분 속 알로카시아
시간을 놓치고 말았네
홀가분하다고 잠시 외치던 월세의 자유가
멀리 날아오르지 못하네
티비에서 북녘의 서늘함이 흘러나오네
겁 없어 보이는 눈빛이지만 실은
겁 많은 눈빛임을 알겠네
창문으로 앞집 감나무를 바라보는 일
에이형 의자의 일상이라네
집과 집의 거리
이끼 푸른 담장은 경계를 모르는데
나는 굳이 벽을 두었네
돌 등에 나앉은 풍란이
세입자처럼 마음을 다잡지 못하네
언제나 웃고 있는 사진 속 나
서성이다 갈 곳 없어 집으로 가네
정녕 집은 없네
♧ 살구나무
비 오는 날
담장에 기대어 서 있는
살구나무의 표정을 살폈다
날개를 다 적시며 울던 새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눈이 파랗게 젖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이라고 했다
노란 햇빛의 불씨를 지피고 싶었다
담장에 턱을 괴고 있는
푸른 아이들
온몸이 다 젖어 있었다
가만히 껴안아주고 싶었다
*이윤승 시집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문학의전당, 2022)에서
*사진 : 분꽃(2022. 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