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이윤승 시집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의 시(3)와 분꽃

김창집 2022. 7. 27. 02:03

 

슬픔을 말아먹었다

 

  오빠는 엄청 큰 파월선을 타고 맹호부대 군가를 부르며 손을 흔들며 월남으로 갔다. 몇 달 뒤 엄마의 꿈은 풍비박산이 났다. 혼자 키운, 남편처럼 의지했던 아들이었다.

 

  이상한 흐느낌 같은 기척에 자다가 자주 눈을 떴다. 오빠도 오빠지만 엄마의 아픔이 더 아팠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는 열세 살이었다. 엄마는 먼 곳을 응시하다가 물에 만 밥을 꾸역꾸역 먹곤 하였다. 오빠가 밟고 지나갔을 박살난 엄마의 꿈 조각이 박혀 있을 것 같은, 그 땅에 꼭 한 번 가고 싶었다.

 

  전쟁이 치열했다던 중부지역 호이안, 엄마가 꿈에서라도 서성거렸을 거라고 생각했던 울창한 밀림은 없었다. 그때의 참상을 잊은 듯 아직 여물지 않은 벼들이 서 있는 푸른 들녘, 꽃이 되지 못한 꽃들이 비문, 아픈 이름들이 풀밭 위에 여기저기 쓸쓸하게 누워 있었다. 그때의 상처를 아프게 말하고 있었다.

 

 

 

바람꽃 이름으로

 

사라오름에서 변산바람꽃을 보았네

땅을 헤집고 낙엽을 들추고 갸웃이 고개를 내밀었네

씨 뿌리는 절기 잊지 않고 찾아와 주었네

 

작고 어린 것들이 맨몸으로 바람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네

한참 동안 가까이 눈을 맞추었네

바람보다 더 많은 종의 바람꽃이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네

 

왜 바람꽃일까

꽃이 아닌 바람에게 묻고 싶었네

알 것 같은 그러나 정녕 알 수 없는,

그저 내 삶의 화두 같은 바람을 생각했네

 

먼 산에게 나무에게 허공에게 구름에게

바람, 하고 소리쳤네

멀리서 묵직한 울림이 따라왔다가 되돌아갔네

 

마음 밖에서 구하지 마라*

 

은자는 오늘도 죽비로 등짝을 후려치지만

마음 밖에서만 구하려고 애쓰고 있는

나는, 기다리다 지쳐갔을

바닷가 고향집 녹슨 자물통을 생각했네

 

교복을 입은 열세 살 단발머리 소녀들이

흑백 사진 속에서 웃고 있네

두고온, 시들지 않는 오랜 기억 속 절기들을

흰 바람꽃의 이름으로 하나하나 불러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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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臨濟錄)에서 차용.

 

 

 

통점

 

문득 뒤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저 멀고 아득한 길이

 

고작 숟가락 품안이었네

 

 

 

세입자

 

네모난 공간 지나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길 하나 있네

 

둥근 테 안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폭이 다른 두 발걸음

방향이 같은 것은 까닭이 없네

노란 머리카락 우수수 떨어지는 화분 속 알로카시아

시간을 놓치고 말았네

홀가분하다고 잠시 외치던 월세의 자유가

멀리 날아오르지 못하네

티비에서 북녘의 서늘함이 흘러나오네

겁 없어 보이는 눈빛이지만 실은

겁 많은 눈빛임을 알겠네

창문으로 앞집 감나무를 바라보는 일

에이형 의자의 일상이라네

집과 집의 거리

이끼 푸른 담장은 경계를 모르는데

나는 굳이 벽을 두었네

돌 등에 나앉은 풍란이

세입자처럼 마음을 다잡지 못하네

 

언제나 웃고 있는 사진 속 나

서성이다 갈 곳 없어 집으로 가네

정녕 집은 없네

 

 

 

살구나무

 

비 오는 날

담장에 기대어 서 있는

살구나무의 표정을 살폈다

날개를 다 적시며 울던 새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눈이 파랗게 젖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이라고 했다

노란 햇빛의 불씨를 지피고 싶었다

담장에 턱을 괴고 있는

푸른 아이들

온몸이 다 젖어 있었다

가만히 껴안아주고 싶었다

 

 

 

                              *이윤승 시집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문학의전당, 2022)에서

                                                              *사진 : 분꽃(2022. 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