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정군칠 유고 시선집 '빈방'의 시

김창집 2022. 8. 22. 00:13

 

산수국

 

 

  산수국을 만나는 일은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제격입니다 산허리를 휘감던 안개의 입자들이 땀방울과 섞여 꽃으로 피어났나요

 

  느닷없이 붉어지던 볼을 감추려 눌러쓴 모자 아래 고백성사처럼 피던 열꽃들이 여태 지지 않고 있었나요

 

  길을 따라 수로가 생겼을까요. 수로를 따라 길이 생겼을까요. 수국길, 물에 없는 길, 눈 밑에 수국 꽃잎 같은 눈물 자국을 남게 한 사람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가파른 산길 오를 때 내 몸을 역류하던, 산수국 속으로 오래전에 들어간 그 물길이 산을 내려올 때 비로소 보입니다

 

 

 

 

칸나

 

 

날마다 철공소에서는

시퍼런 정신이 튀어오르네

 

굽어 있던 철근들이 몸 펴는

소리 들려오네

 

,

 

팽팽히 조율하며 살의 결을 타고

튀어 오르는 저 징한 소리들

 

오늘 한 송이 붉은 칸나로 피어올랐네

 

 

 

보성리 수선화

 

 

보성리* 연못가를 지날 때마다

머릿발 곤두서는 찬 기운을 만난다

하늘을 밟고 오는 소나무의 그림자가

적막한 마을길을 자빠뜨린다

숭숭한 돌구멍,

경계를 넘나드는 바람은

저승의 그리움을 머리째 끌고 와

돌담 아래 수선水仙을 피워낸다

 

가슴을 확확 불 지른 하얀 등

 

골목을 호령하는 바람 끝으로

어디서 본 듯하다

봉두난발이나 꼿꼿이 허리 세운

추사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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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리 : 제주도 대정읍의 작은 마을. 추사 김정희의 적거지가 있다.

 

 

 

너븐숭이 애기똥풀

 

 

소나무는 제 그늘에

남의 식솔 두지 않는다, 하지요

그런데 웬일인가요

너븐숭이 애기무덤 가 솔가지들은

애기똥풀 노란꽃들을

품 안에 들이네요

육십갑자 전의 일 엊그제인 양

사월 어느 하루 날을 잡아

송홧가루 날리네요

아가들의 혼백 위로

눈물 같은 비를 섞어 초유를 흘리네요

구멍 숭숭 돌담에

애기똥풀 노란 꽃 피어나네요

 

애면글면 멀대같던 소나무

예순 해 넘게 해 온 일이라, 하네요

 

 

 

해녀콩

 

 

태아의 발길질에

멀미나는 세상이 있었다지

저승길 멀다 해도

바다 속 그 길만 할까

들숨이 있는 한 살아있는 목숨이라

홑적삼에 달랑 바지 한 잎

 

날아가다 멈추었다는 비양도, 팔랑못 가

바다 향해 섬칫섬칫 줄기 뻗은

줄기 끝 콩꼬투리 야물게 매달려 있다

 

바다는 날콩의 비린내를 노을빛으로 받아낸다

 

바다 속 드나듦이 사는 길이라

속엣것 지우려

한 됫박 날콩을 먹었다지

불턱에 모여 앉은 젊은 해녀들

탯줄처럼 이어지는,

상군 해녀 허리의 납덩이같은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하지

 

그런 날 바다는 놀빛 더욱 붉어지고

 

 

                                             *정군칠 유고 시선집 빈방(고요아침, 201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