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이애자 시집 '풀각시'의 시조(3)와 해녀

김창집 2022. 8. 23. 00:21

 

단호박

 

 

때로는 흠집 하나가 속을 더 여물게 한다

두둘두둘 상처에 딱지가 앉는 동안

저 열외 왜소한 몸집 칼 앞에 단호하다

 

 

 

고추잠자리

 

 

몇 번의 껍데기를 벗어야 우주와 통할까

빨갛게 나사를 조이는 작은 것들의 날갯짓

가을의 깊이와 높이를 조절하는 중입니다

 

 

 

무 썰다

 

 

무채를 써는데 슬라이스가 고르지 않네

뚝딱 뚝 딱 무뎌진 리듬에 연장을 탓하는

육십 년 살림 내공이 도마 위에 올랐네

 

쓱 초승달 쓱쓱 반달 쓱싹쓱싹 보름달

달의 주기처럼 가지런히 기운 무 앞에

산 날을 헤아려보니 둥근 날도 꽤 많았네

 

 

 

천사의 나팔꽃

 

 

바닷가 후미진 곳 늙은 트럭 낡은 주인

삶의 음계를 찾느라 뭉툭해진 겉과 안이

이따금 나팔만 잡으면 활짝 피는 사내가 있다

 

 

 

한걸음

 

 

햇살은

섬 섬

새싹들을

세우네

 

할머닌

섬 섬 섬

손주 녀석

세우네

 

촛불은

섬 섬 섬 섬 섬

울 나라를

세우네

 

 

 

하루

 

 

귀천을 앞둔 하루살이 목전이 분주하다

식탁 위 좌초된 바나나는 북새통인데

사랑아, 짝을 맺었으니 아무 여한 없구나

 

 

                                    *이애자 시집 풀각시(한그루, 2022)에서

                                                 *사진 : 해녀의 사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