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이애자 시집 '풀각시'의 시조(3)와 해녀
김창집
2022. 8. 23. 00:21
♧ 단호박
때로는 흠집 하나가 속을 더 여물게 한다
두둘두둘 상처에 딱지가 앉는 동안
저 열외 왜소한 몸집 칼 앞에 단호하다
♧ 고추잠자리
몇 번의 껍데기를 벗어야 우주와 통할까
빨갛게 나사를 조이는 작은 것들의 날갯짓
가을의 깊이와 높이를 조절하는 중입니다
♧ 무 썰다
무채를 써는데 슬라이스가 고르지 않네
뚝딱 뚝 딱 무뎌진 리듬에 연장을 탓하는
육십 년 살림 내공이 도마 위에 올랐네
쓱 초승달 쓱쓱 반달 쓱싹쓱싹 보름달
달의 주기처럼 가지런히 기운 무 앞에
산 날을 헤아려보니 둥근 날도 꽤 많았네
♧ 천사의 나팔꽃
바닷가 후미진 곳 늙은 트럭 낡은 주인
삶의 음계를 찾느라 뭉툭해진 겉과 안이
이따금 나팔만 잡으면 활짝 피는 사내가 있다
♧ 한걸음
햇살은
섬 섬
새싹들을
세우네
할머닌
섬 섬 섬
손주 녀석
세우네
촛불은
섬 섬 섬 섬 섬
울 나라를
세우네
♧ 하루
귀천을 앞둔 하루살이 목전이 분주하다
식탁 위 좌초된 바나나는 북새통인데
사랑아, 짝을 맺었으니 아무 여한 없구나
*이애자 시집 『풀각시』 (한그루, 2022)에서
*사진 : 해녀의 사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