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강영은의 PPE '산수국 통신'의 시

김창집 2022. 8. 25. 00:08

 

 

귀거래

 

 

  돌무더기 가슴 답답한 날이면 제주행 비행기를 탄다 바닷가 빈 집으로 돌아간다 잡초 무성한 밭을 일구고 밤바다에 어망을 던져두니 물 밖으로 나온 밤 낙지처럼 눈이 맑아진다 정신을 육체의 노예로 만들었던 서울을 도망치듯 벗어난 일이 그대 탓인가, 물결은 한결같은 문장에 밑줄을 칠 뿐 별빛에도 눈동자에도 가없는 밀물

 

  사람을 꽃이라 부르는 일도 사람을 흉기라 여기는 일도 그때는 솔깃했으나 모든 비유는 낡아지는 법, 내 스스로 산을 그대라 불렀고 바다를 그녀라 불렀으나 지금 나에게 그대도 없고 그녀도 없으니 스스로 젖은 적 없는 저, 산과 바다를 무슨 비유로 노래할 것인가

 

  죽은 귀를 깨우는 파도소리에 나는 다만 혀로 쓰는 붓질과 귀가 잣는 소음과 멀어지고 싶을 뿐 물결과 거래하는 나의 귀거래는 오늘을 말없이 건너는 일, 파랑이는 나를 견디는 일일 것이다 물결이 빠져나간 여는 이미 마른 슬픔, 썰물을 불러들이는 두 다리가 몇 척길어진다

 

  언제 올지 모르는 썰물, 그 바닷가에서 섬이 된 사람들을 오래 기다렸다

 

 

 

오래 남는 눈 - 강영은

 

 

  뒤꼍이 없었다면, 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가 없었으리라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쓸어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우는 어린 내가 없었으리라 맵찬 종아리로 서성이는 그 소리를 붙들어 맬 뒷담이 없었으리라 어린 시누대,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눈꽃 피어내는 대나무처럼 푸르게 눈 뜨는 깊은 밤이 없었으리라 아마도 나는 그늘을 갖지 못했으리라 한 남자의 뒤꼍이 되는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하지 못했으리라 제 몸의 어둠을 미는 저녁의 뒷모습을 보지 못했으리라 봄이 와도 녹지 않는 첫사랑처럼 오래 남는 눈을 알지 못했으리라 내 마음 속 뒤꼍은 더욱 알지 못 했으리라.

 

 

 

서귀포

 

 

서귀포에서는 누구나 섬이 된다

섶섬, 문섬, 범섬, 새섬이 배후여서 새연교 난간에

한 컷의 생을 걸어놓은 사람은

섬으로 건너가는 일몰이 된다

서귀포에서는 누구라도 길을 묻는다

바다를 향해 흘러내리는 언덕에 서서

여기가 어디냐고, 서 있는 곳을 되돌아본다

당신이 서 있는 거기서부터 서귀포는

언제나 서쪽이다

녹두죽같이 끓는 바닷가 찻집에 앉아

노을처럼 긴 편지를 쓰면

기억만큼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언제쯤 당신에게 닿을 수 있을까,

불붙는 해안선을 지나면 또 해안선

긴 문장이 따라오는 지상에서

가장 참혹하고 아름다운 편지를 쓰고 있다면

당신은 서귀포에 있는 것이다

떠도는 섬을 당신의 마음속에

붙잡아 앉힌 것이다

 

 

                                           *강영은의 PPE 산수국 통신(황금알,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