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2)와 물봉선

김창집 2022. 9. 9. 00:05

 

꼬리를 자르다 이종섶

 

 

나는 꼬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 불편해

꼬리를 잘라 버렸다

 

그런데도 가끔씩 꼬리가

다시 자라는 느낌이 날 때가 있어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이럴 거라면 아예 꼬리뼈의 뿌리까지

파 내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바닥에 눌려 있는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엉덩이에 힘을 주며

오래 앉았다 일어선다

 

 

 

메모리 - 유성임

 

 

50번 고속도로 양지 부근

솟대의 무리가 서 있고

산 너머 저 너머

납골당 수목장 위로

노을이 내려앉고

꽁지 빠진 솟대는 하염없이

산 너머를 기웃거릴 때

저편의 기억이 된 바람이 불면

별은 하나 둘흔들리고

그곳을 지나는 누군가의 메아리는

수신도 발신도 없는 미아가 된다

 

 

 

면벽수행 - 조성례

 

 

이웃집에서 보내온 모과

식탁 귀퉁이에서

참선에 들었다

엉덩이 한 번 들지 않고

 

온몸에 저승꽃 피우고

귀퉁이가 썩어가고 있다

썩어가면서도 꼿꼿이 고개 들고

도려낼 살을 잃어버린 채

향기는 더 짙어지고 있다

우리는 모르는 채 쩝쩝거리며 밥을 먹는다

 

골분을 파먹는 애벌레와 동거하며

파먹은 자리가 구멍이 나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는다

색깔이 엷어질수록 갈변하는

갈변할수록 키가 작아지는

깔고 앉은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모과

줄어들어도 주름 한 번 만들지 않는

식탁 귀퉁이에 모과

 

여전히 면벽의 자세로 앉아있는 저 노스님

 

 

 

푸른 갈기의 야수와 미녀 - 김종욱

 

 

한 줄기 빛이

마지막 남은 장미 꽃잎 위를 흐르고 있어요

적막한 어둠을 깨며 닭이 두 번 울면

시커멓고 커다란 고딕 양식의 성은 사라지고

주조 유리로 지어진 연꽃 모양의 사원이

하늘에 드리운 구름 사이로 나타나

빛나는 형상으로 쏟아질 거예요

 

기다릴 수 있나요

차갑거나 뜨겁거나

무서워하거나 사랑하거나

 

이 금빛 꽃가루 흘리는 붉은 장미도

푸른 수염 자라난 뿌리를 가지고 있어요

호기심을 먹고 자라나죠

그래도 마지막 꽃봉오리는 열지 마세요

당신을 헤치진 않을 거니까

 

곧 방울 소리 울리는 비가 내릴 거예요

올리브기름이 든 병을 들고 있는 세라핌도

빛을 타고 내려오고 있어요

그 날개의 바람과 빛과 비는

면사포 같은 흰 물결 되어 흐르고 있어요

사실 정말로 그렇지는 않아요

아마도 그렇게는 안 되겠죠

 

그 밝음 다하기 전의 부드러운 밤에

그림자에 부딪히는 빛의 파도 부서지고

감미로운 검은 포도송이가 반짝거릴 때

수많은 유성의 세례로 얼굴을 씻고

나의 진실을 보여 줄게요

구름과 비슷한 표정으로 변화하는 하늘이

반짝이는 푸른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지금 사랑의 불길은 푸른 수정 안에서나

타오르며 빛나고 있을 뿐이에요

 

새벽녘의 꿈처럼 생생한 향초와 몰약,

안색이 달라지는 빛살은 금빛 가면,

썩어지는 말뚝에 매인 억압,

나는 괴물이 아니에요

지옥의 문은 나를 통하지만

빛에 부딪히며 살아있어요

거짓, 거짓말이에요

나도 나의 실체를 외면하고 싶은 거예요

 

한껏 오므린 꽃봉오리여

내 얼굴을 밝은 눈으로 비추지 말아요

오직 몽롱한 눈빛으로

반쯤만 벌어진 입술에

운율과 문체의 음료로 흐르게 해 줘요

우리는 거짓인 동시에 진실이기 때문에

그 애매모호함 때문에

이 애매모호함을 위하여

 

 

 

손의 벽 - 서숙희

 

 

손뼉을 손벽으로 잘못 쓴 글을 보고

손의 벽,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알았네

그런 환한 벽이

세상에 있다는 걸

 

마주하여 하나 되면 따스한 기도가 되고

의기투합 신명나면 우레 같은 박수가 되는

그런 벽 우리에게 있네

내게 있네

네게 있네

 

 

                                                *월간 우리20229월호(통권 41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