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자 시집 '풀각시'의 시조(6)
♧ 지슬*
요 눈만 붙은 것들 배롱헌 날 있을까
까마귀떼 까악까악 까맣게 휘젓다 가면
입단속 몸단속하며 죽어 산 세월 알까
알드르 새벽하늘 탄피처럼 박힌 별
알알이 문드러져도 일일이 도려내
묵묵히 산 날들이 ᄆᆞᆫ 데작데작 곰보네
그 눈만 붙은 것도 배롱헌 날이 있어
한 줄 한 줄 갈아엎어 곱게 친 이랑마다
쌍시옷 거꾸로 써도 싹은 자라 제구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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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의 제주어
♧ 금자삼춘
젖먹이 들쳐 업고 북촌을 향한 걸음
넋 나간 어머니의 손힘에 이끌린
여섯 살 그 어린 것이 울 수조차 없었다
얼떨결 외삼촌 따라 경찰이 된 아버지
목에 닻이 감기고 팔다리 묵인 채
바다에 수장 됐다가 보름만에 떠오른
새파랗게 기억되는 새파란 아버지
봄 햇살 한 벌로 따뜻이 염을 끝내고
하얗게 이승을 지우는 광목천 한 겹의 생
독해져야 산다는 외할머니 채근에도
딸의 입학통지 받고서야 번쩍 정신이 든
어머니 바느질 하나로 써 내려간 마흔 해
폭도니 토벌대니 방화니 학살이니
섬을 함구하던 사월의 어휘가 풀리고도
가슴에 피는 섬동백 왜 뜨겁고도 시리다
♧ 옥돔
모슬포 사람이면 바람 자국 하나쯤
오장육부 헤집는 염장의 고통쯤
광풍에 납작 엎디어 바짝 마른 세월쯤
♧ 격납고 앞에서
톰보연필 하나 간절하던 시간이 있네
가난에 억눌린 내 마음은 식민지였고
아무리 침을 발라도 살리지 못한 풍경이 있네
가슴 한가운데 패망의 낙인처럼
요철무늬 검은 형틀에 격납된 공허함
평화의 순례자들의 리본 하나가 더해지네
가끔 흙먼지 일으키며 내려앉는 바람이 있네
무모한 착륙엔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네
아무리 침을 뱉어도 지울 수 없는 역사가 있네
♧ 알드르 가는 길
누가 칼바람 앞에 저자세라 하겠나
납작이 땅에 붙어 겨울을 나야 하는
냉이꽃 깊게 괸 눈물 하얗게 마르는데
앞 뒷장 찟겨 나간 겨울이랑 행간에
퍼렇게 동상 걸려 나뒹굴던 감자 몇 알
꼼지락 가려운 자리 뾰족뾰족 돋은 싹
삼 년에 한 번은 얻어걸린다는 농사 셈법
인건비 비료 값 다 제하고 나면
살그랑 식은 땅에서 연골 닳은 바람소리
*이애자 시집 『풀각시』 (한그루,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