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은의 PPE '산수국 통신'의 시(4)
♧ 청견淸見
바람이 북풍을 몰고 계절의 끝자락으로 사라진 어제는 귤나무 잔가지를 쳤다 어린 목숨만 골라 벤 망나니가 되었다 가을에 돋은 가지라야 꽃을 피운다는 걸, 꽃피지 못할 목숨만 남긴 허실을 접하고 나서 베이비박스에 어린 것들을 내다버린 미증유의 봄이 밥때를 놓아버렸다
어느 눈(目)의 굴욕일까, 귤도 사람도 되지 못한 패착을 찾느라 오늘은 한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건피증 앓는 살갗에 손을 얹고 오렌지와 교배한 귤나무만 착실히 읽었다 몇 번의 계절을 넘기다보면 슬픔도 맑아져 윤기 나는 이마를 남긴다고, 귤나무는 이마에 새겨진 푸른빛을 모조리 지웠더구나 그 빈자리를 헤아리는 눈이 상등품과 하등품을 고른다는데 까마귀처럼 흐린 내 눈은 낯짝이 두터운 오렌지와 말랑말랑한 귤이 서로의 본색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보며 이(利)와 해(害)가 서로를 돕는 일이 무공해라는 걸 배우는 중이다
청견 한 박스 보내니 가렵다고 너무 긁지 마라, 저토록 노랗게 익기까지 얼마나 많은 푸른색을 버렸겠니, 상처가 꽃이 되고 부스럼딱지가 열매로 자라는 일이 쉬운 일일까 마는 虛와 失마저 푸르게 보는 이 봄에는 딱지 떨어진 귤나무에도 죽은 내 안목에도 새 살이 돋지 않겠니
♧ 죽은 돌
제주에서는 죽은 돌이 산 사람을 지킨다 진펄 같은 검은 몸체는 한 덩어리 죽음에 불과하지만
화산이 베껴놓은 크고 작은 화첩이어서 생이 날개에 뱀 모가지를 얹혀 전설을 부풀리거나 제주꼬마팔랑나비가 넘나드는 유곽이 되기도 한다
가까이서 보면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어본 적 없는 가슴팍, 올망졸망한 자식들을 떠나보내는 갯가의 돌덩이들은 늘 젖어 반지르르하다
먼 바다에 바람이 일 때면 칭얼대는 파도를 끝없이 안아주는 황홀한 그늘,
뜨거운 불길에 눈도 코도 입도 녹아내린 몸뚱어리는 아랫뜨르 과수댁을 품은 돌하르방으로 서 있다
무너질 때 산목숨보다 더 크게 소리 내는 돌 더미는 죽은 돌이 아니다
태풍이 불때마다 복숭아뼈까지 주저앉히는 유장하고 뜨거운 아버지, 돌무덤 앞에서 나는 매번 발이 고꾸라져 어깨를 들썩이는 것인데
돌에서 왔다가 돌로 되돌아간 죽은 뼈들이 만 팔천 名의 神을 불러오는 것인지 제삿날에는 산 사람이 죽은 돌을 지킨다
♧ 제주 한란
비바리는 제주에서 자생한 꽃이다
한라산 흙 속에 묻힌 진짜 뿌리가 아니면
잎과 줄기를 쉬이 허락하지 않는 꽃이다
진짜를 흉내 내는 가짜 뿌리는 어느 곳에나 있고
아마존 유역에는 몇 개씩 달고 다니는 부족도 있다지만
가짜가 피우는 것은 태어난 곳을 잃어버린 헛꽃이다
진짜 꽃은 바다를 길들이는 고래를 꿈꾼다
외로울수록 차고 높은 호흡을 내 뿜는다
이어도를 바라보는 꽃은 그렇게 살촉을 매단다
도시마다 그녀를 복제하는 꽃집이 있다지만
손돌이추위 속에서도 거친 숨소리를 내뿜는 선돌 앞이나
고래 심줄 같은 물줄기가 등을 껴안는
돈내코 부근에 가면 암노루처럼 보짱한 그녀들을 볼 수 있다
사철 푸른 나무들이 꼿꼿이 서 있는 해발 900미터
눈 속을 달리는 두 다리가 섬 밖으로 치우치지 않는 그곳이
그녀들의 북방한계선이다
* 강영은의 PPE 『산수국 통신』(황금알, 2022)에서